세계 산책

아일랜드 자유국가의 탄생을 견인한

마이클 콜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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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민경(가톨릭관동대학교 Verum 교양대학 교수)

 

“조약은 궁극적인 자유가 아니라 성취할 자유를 제공하는 것이다.” 아일랜드 자유국가의 탄생을 견인한 마이클 콜린스가 남긴 명언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0주기가 된 해를 맞아 생전에 그가 설파한 ‘자유를 위한 독립투쟁’의 업적을 되돌아보고,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던져주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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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A 재무장관 시절 마이클 콜린스


사후 100주기를 맞은 마이클 콜린스

1996년 영화 〈마이클 콜린스〉가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세계의 이목을 받았다. 아일랜드 ‘부활절 봉기(Easter Rising)’ 100주년의 해였던 2016년에는 워너브라더스가 이 영화를 ‘아카이브 콜렉션’으로 만들어 콜린스의 독립운동 여정을 전 세계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콜린스의 사후 100주기를 맞은 올해, 우리나라를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그의 업적을 기리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쿠바 혁명하면 체 게바라를 연상하듯 콜린스가 아일랜드 독립에 막중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임을 증명하는 움직임들이다. 아일랜드의 신문사 『아이리시 타임즈』가 실시한 ‘독립 밀레니엄 기념 설문조사’에서는 그가 아일랜드공화국의 ‘세기의 인물’로 선정된 바 있다. 그러나 아일랜드 독립에 내재한 ‘분리의 역사’처럼 그에 대한 평가도 양극으로 나뉜다. 콜린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를 미국의 링컨과 케네디 대통령이 합쳐진 인물로 여긴다. 아일랜드 남북전쟁에서 아일랜드를 자유국가로 만들었으나 끝내 살해되어 생을 마감했던 영화 같은 삶 때문이다. 반면 콜린스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를 미국 독립전쟁 당시 대륙군을 배반한 베네딕트 아놀드로 여긴다. 통합된 아일랜드공화국 형성을 방해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양측의 견해가 무엇이든 콜린스가 아일랜드 독립의 역사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그가 아일랜드 혁명기간(1916-1923)에 맡았던 아일랜드공화국군(IRA: Irish Republican Army) 정보국장·재무장관·임시정부 의장 및 아일랜드 자유국군 총사령관 등과 같은 여러 직책은 이를 대변해주기에 충분하다.


가열찬 투쟁의 계기가 된 ‘부활절 봉기’

헨리 8세의 아일랜드에 대한 잉글랜드 국왕의 통치 선언 이후,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정복과 통치의 대상으로 영국의 영향권에 놓였던 수모의 역사를 갖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아일랜드공화주의 혁명단체 ‘아일랜드인 연합’은 이러한 억압의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아일랜드 반란(1798)’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1800년 합병령에 의해 아일랜드 의회가 해산되었고, 1801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으로 합병되었다. 19세기 동안에도 ‘아일랜드 청년당의 반란(1848)’, ‘페니언 반란(1867)’ 등 산발적인 반란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1차 대전이 발발하여 글래드스턴과 에스퀴스 총리 시기에 추진되던 아일랜드 자치권의 미래가 불투명해지자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 ‘부활절 봉기(1916)’가 일어났다. 우리나라의 3·1운동과 같은 역사성을 갖는 이 봉기는 영국으로부터 독립된 공화국의 수립을 목표로 하였다. 영국군의 압도적인 무력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 시기까지 이어져 온 영국에 대한 항쟁의 불씨가 더욱 크게 타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콜린스는 이 봉기에 참여한 계기로 독립투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지도부가 처형당하고 그도 체포되어 옥고를 겪었지만, 그에게 포로수용소에서의 시간은 과거 아일랜드에 일어난 봉기들의 실패를 분석하여 부족한 조직의 결점을 파악하고 투옥된 공화주의자들의 집결을 모색하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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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콜린스(1890-1922)의 장례식 

오랜 투쟁 끝에 이룬 ‘아일랜드-영국 조약’

1919년 1월 21일 아일랜드공화국군(이하 IRA)이 왕립 아일랜드 보안대 소속 경찰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흘 후, 과거 1916년 ‘부활절 선언문(Easter Proclamation)’이 공포되었던 곳에서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알리는 발포가 이루어졌다. 전후 설립된 아일랜드 제헌의회(Rebolutionary Dail)가 아일랜드 독립을 선언하고 IRA에게 전쟁 개시를 명령한 것이다. 이때 콜린스는 IRA 단장으로 첩보와 의용군 조직, 보어인들의 전투 방식을 모사한 게릴라전의 효과적 운영을 맡았다. 콜린스는 2년 반의 게릴라 투쟁 끝에 영국의 로이드 조지 총리를 협상 테이블에 앉게 하였다. 영국 정부와의 평화협상은 ‘아일랜드-영국 조약(1921)’으로 이어지며 새로운 아일랜드 자유국가(Irish Free State)의 탄생을 가져왔다.      

그러나 ‘북아일랜드 6개주가 제외된 자치 보장’과 ‘영연방 일원으로서 영국의 군주를 수장으로 삼아야 한다’는 내용이 문제였다. 아일랜드 독립전쟁에 참가했던 IRA의 약 70%가 이 조약에 반대하였고 끝내 아일랜드는 분열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부활절 봉기에서 함께 싸웠던 데 발레라(Eamon de Valera)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와 적이 된 콜린스는 결국 피로 쟁취한 ‘자유국’이란 결과를 가지고도 ‘아일랜드 내전(1922~1923)’의 발발을 막지 못했다. 종국에는 반조약 아일랜드 군대(Anti-treaty Irish Forces)의 매복군에 의해 그가 태어난 코크주 빌나블라 계곡에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 대립의 여파는 현재까지도 통일아일랜드당(Fine Gael)과 아일랜드공화당(Fianna Fail)의 양대 정당으로 지속되고 있다.


오늘날 재조명되는 콜린스의 업적

아일랜드는 데 발레라의 총리 재임 중 북아일랜드 6개주를 제외한 독립 민주주의국가 에이레(Eire, 1937)로 재탄생하였다. 1931년 가입했던 영연방에서는 1949년 탈퇴함으로 진정한 독립국가로 거듭났다. 그러나 이것이 콜린스의 결과물에서 180도 달라진 것일까?       

데 발레라의 집권은 콜린스에 대해 불리한 기억을 기록으로 남게 하였다. 그러나 콜린스가 취했던 전술은 이후 혁명가들의 연구대상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샤미르(Y. Shamir) 총리는 이스라엘 독립전쟁 중 ‘마이클’이란 암호를 사용할 정도로 그를 존경하였다. 영국이 두려워했던 콜린스의 대담함과 집요한 끈기 그리고 투쟁 과정에서의 눈부신 성취들은 현재 아일랜드 독립사에서 기억해야 할 디딤돌로 재조명되고 있다.       

대한민국을 일구어낸 수많은 독립투사를 기억의 장으로 모으는 광복절 즈음, 불안전한 휴전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콜린스가 던졌던 “무엇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보다 무엇을 얻었는지를 바라보자.”라는 말을 곱씹어보며 완성된 독립을 위해 갈등과 분리보다는 통합을 향한 행보를 내디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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