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국경을 초월한 항일투쟁

이숙진·조성환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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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옛 유교에서는 부위부강(夫爲婦綱) 즉 남편은 아내의 벼리(뼈대)라 했다. 그러나 독립운동사를 보면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벼리는 아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편의 가시밭길을 동행한 아내들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빙산의 일각 뿐이다. 임시정부 군사정책을 이끈 조성환의 행적은 다수 확인되지만, 그를 묵묵히 도왔던 이숙진의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온전한 추적은 어렵지만, 국가보훈처 공훈록 등에서 알 수 있는 행적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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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진·조성환 부부

국권회복운동에 나서다

조성환은 1875년 7월 9일 경기도 여주군 보통리에서 조병희(曺秉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대로 관직을 지낸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부친도 진사였다. 본관은 창녕, 호는 청사(晴蓑)로 이명은 조욱(曺煜·曺旭)이다. 25세가 되던 해 1900년 11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했다. 육군무관학교는 장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일 뿐 아니라 외국어를 비롯한 신학문을 접할 수 있는 최고학부였다. 신규식·서상팔 등 동기생과 노백린·김희선 등 교관과의 만남은 훗날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일제와 결탁한 세력은 권력을 악용하고 군부를 부패시키고 있었다. 육군무관학교 졸업을 앞둔 조성환은 “썩은 군대는 곧 나라를 망치게 한다. 속히 썩은 자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시켜야 한다.”라며 부패한 군부를 숙청하려다 발각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3년 만에 참위로 임관되었으나 군대해산 때까지 군적만 유지할 뿐이었다. 이때 상동청년회에서 국권회복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07년 안창호·양기탁 등과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평양 기명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안중근이 만주로 갈 때 도움을 주기도 했다.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모색하다

1908년 1월 조성환는 연해주로 가서 최재형을 만나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논의했다. 이후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국내를 비롯해 만주·러시아·미주 등지의 독립운동가들과 연계했고, 한편으로는 중국 인사와 교류하며 청년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몰두했다. 이때부터 조욱이란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이를 독립운동을 고무할 기회로 여겨 신규식과 함께 난징으로 건너가 공화혁명에 참여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중국의 호조기관인 동제사를 상하이에 조직했다. 그러나 가쓰라 다로 일본수상의 암살음모 혐의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1년간 유배생활에 처하였다. 유형에서 풀려나자 곧바로 베이징으로 가서 신규식 등과 신한혁명당을 조직했고, 중국 동북지역과 연해주 등지에서 대한민족의 자립을 천명한 「대동단결선언」에 참여했다. 아울러 중국 당국과 교섭하여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 둔전병제 실시를 위해 노력했다. 러시아혁명 즈음 독립운동을 펼칠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여 독립군 양성을 위해 연해주로 갔으나 동료들과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하였다.


군사정책을 도모하다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여론이 끓어오르자 조성환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상하이에 모였다. 4월 10일에 열린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연호를 결정하고 「대한민국임시헌장」을 통과시켰다. 최초로 민주공화정을 표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조성환은 군무차장에 선출되어 군사정책을 맡았다.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독립군을 길러내기 위하여 러시아 니콜리스크로 갔다. 그곳에서 박용만을 만나 대한국민군을 편성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뜻을 모았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다. 이후 대한정의단에 합류하여 대한군정부를 수립한 후 중국 당국과 적절한 관계 유지에 힘을 기울였다. 대한군정부는 대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고 임시정부 소속으로 편제되면서 독립군을 길러내는 데 힘을 쏟았다. 조성환은 총재 서일과 재무부장 계화 등과 함께 러시아로 가서 니콜리스크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과 무기 구입 계약을 맺었다. 이는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한인사회를 초토화한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이에 대한군정서를 비롯한 많은 독립군단체는 러시아 정부의 지원을 기대하며 러시아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 조성환은 김좌진·홍범도와 부총재를 맡아 조직을 이를 이끌었다. 동포들이 많이 거주한 이르쿠츠크에서 군관학교 운영과 러시아 내전에 참여한 그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상하이로 이동했고, 이 때문에 자유시참변을 피할 수 있었다. 상하이를 중심으로 홍콩과 광둥을 오가며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노력한 그는 이후 베이징에 머물면서 자유시참변 당시 만주로 흩어져 되돌아온 독립군을 다시 모으는 방법을 고민했다. 이세영·박용만·황학수 등과 독립군 조직 통합과 군사 양성 방법을 논의했다. 북경군사통일회의가 바로 여기에서 형성된 것이다.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나서다

1922년 가을 북만주로 가서 무장대를 조직하는 한편 대종교를 적극 후원했다. 독립군이 안정적으로 활동하려면 동포사회부터 안정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각지를 방문한 결과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으나 대통합에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군사 모집과 사관학교 설립에 착수하고, 만주 각지에 군자금을 모으는 등 군정서 재건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남만주에서 전만통일회의주비회가 탄생하자 1925년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한 신민부를 탄생시켰다.       

아울러 좌우로 나뉜 독립운동단체를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하여 국가를 움직이는 이당치국 체제를 구현하려는 민족유일당운동을 주도했다. 안창호가 주도한 이 운동은 베이징의 좌파 세력과 힘을 합쳐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창립하는 등 첫 성과를 올렸다. 여기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조성환은 원세훈 등과 공동으로 선언서와 간장(簡章)을 기초한 후 집행위원 겸 대표로서 대당 결성을 위한 활동을 이끌었다. 그는 민족유일당운동이 독립운동계 통합만이 아니라 만주 이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북경촉성회 창립 직후 입적간민회를 조직하여 한인들이 중국 국적을 갖고 안정적 정착을 함으로써 독립군 활동 기반을 다지도록 하였다. 한편 이 무렵 일제가 미쓰야협정으로 대종교 포교금지령을 내리자 박찬익과 더불어 외교를 펼쳐 이를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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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환 고택(여주시 대신면)

임시정부 군사정책을 이끌다

1929년 민족유일당운동에서 좌파가 이탈하자 조성환은 우파 인물들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다. 임시의정원 경기도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베이징에 머물면서 한국독립당 북경지부 간사로 활약했다.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이동하던 시기에 국무위원으로 선출된 그는 임시정부 강화를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한편 1935년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갈등으로 다수 인물이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임시정부를 떠났다. 임시정부를 고수한 조성환은 그해 11월 이시영·양우조 등과 한국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을 지도·감독했다. 이어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군무장에 선임되었고, 이때부터 줄곧 국무위원으로서 군사업무를 총괄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즈음하여 임시정부는 군대 창설 계획에 서둘렀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방략을 군사인재 양성·군사통일기관 설치·특무사업 실행 등으로 정하였다. 조성환은 군무장이자 군사위원회 책임자로서 군사특파단 주임에 선임되었고, 한인 청년들을 모으기 위해 산시성 시안으로 갔다. 1940년 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당군’이 아니라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대한제국군과 독립군을 계승했음을 천명하였다. 헌법 개정에 따라 정부 각료 명칭이 변경되자 군무장에서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광복군이 성립한 지 두 달 만에 총사령부는 시안으로 전진 배치되었고, 군사특파단과 모병된 인원으로 제1·2·3지대를 편성한 후 아나키스트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제5지대로 합류시켰다. 한편 중국국민당 정부는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을 내놓고 광복군의 작전지휘권을 비롯하여 인사권까지 예속시켰다. 이에 조성환은 군무부장으로서 “광복군이 중국에 예속된다면, 광복군은 도리어 우리 독립운동을 말살하는 기관일 뿐이다.”라며 반발했다. 그 결과 중국 군사위원회으로부터 한국광복군 통수권을 되찾아오게 되었고, 곧이어 조성환은 군무부장 자리를 내놓고 무임소 국무위원이 되었다. 1935년 이후 지청천에게 넘긴 10개월을 제외하면 오로지 군정업무만 9년 동안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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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진·조성환 부부

국경을 초월해 부부의 연을 맺다

조성환은 중국인 이숙진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조성환의 첫째 부인 조순구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국내로 귀국했다. 조성환과 이숙진이 어떻게 만났는지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다. 1900년생으로 조성환과 25살이나 차이가 나는 이숙진은 조성환이 군사정책을 추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숙진이 임시정부 요인들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아내로서 자리를 지킨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숙진은 중일전쟁 이후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추진하는데 국민당정부와 교섭의 통역 등을 자원하였다. 임시정부 외곽단체 활동 등은 물론 한국혁명여성동맹 활동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민족정체성을 일깨우려는 3·1유치원 등에 대한 지원은 이를 방증한다. 조성환은 독립운동에 헌신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자식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하지만 그의 유일한 혈육인 딸 연경은 1931년에 사망했고, 양자인 규식도 1942년 사망했다. 이후 이숙진은 남편의 독립운동에 방해되지 않기 위해 자식을 두지 않았다. 이는 국경을 초월한 나라사랑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광복 후 건국사업에 동참하다

조성환은 1945년 12월 2일 환국한 이후 대한민국군사후원회 총재·간도협회 고문·성균관 부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과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남은 삶을 오로지 나라를 반듯하게 만드는 데 쏟아부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두 달이 지난 1948년 10월 7일 마지막으로 머물던 종로 6가 낙산장에서 사망하여 효창공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묻혔다. 이숙진은 남편의 활동을 든든히 지원했으나 자신의 공과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정부는 조성환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이숙진에게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국경을 초월한 이들의 항일역정은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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