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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3년,건국을 위한 최후의 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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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한성(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이에 따라 일제라는 공동의 적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은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그것은 민족의 독립을 완성하고 민족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최후의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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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을 맞아 마포형무소에서 출옥한 애국지사와 환호하는 시민들

우리가 원했던 민주주의는?

건국을 향한 최후의 결전은 대체로 세 가지 지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진행됐다. 첫째는 자유민주주의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서방사회의 중심 국가였던 미국과 영국을 모델로 삼았다. 이승만과 김구·송진우가 대표적인 지도자이다. 둘째는 인민민주주의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공산주의의 종주국 소련을 모델로 삼았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소련식 민주주의를 절충한 제3의 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미국식 민주주의와 소련식 민주주의의 장단점을 모두 고려하고자 했다. 그들에겐 미소 양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고 있다는 현실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런 현실에서 민족통일국가를 수립하는 유일한 방법은 어느 한쪽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 친선을 표시하며 등거리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여운형과 김규식이 여기에 해당하는 지도자이다.

광복 직후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여운형이었다. 그는 안재홍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만들어 조선의 치안을 맡으며 건국을 위한 사업을 주도했다. 경성중앙방송을 통한 안재홍의 대국민연설은 억눌렸던 한국인의 정치참여 욕구를 촉발했다. 광복된 지 2주 만에 전국 145개소에 건준 지부가 설치될 정도였다. 건준은 우익과 좌익 세력이 함께 참여한 정치조직으로 광복 직후 큰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여운형은 한 가지 실수를 했다. 미군이 진주하기 직전 협상력을 높이겠다는 생각으로 건준을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으로 전환하고 건준 지부를 지방인민위원회로 개편한 것이다. 그러나 9월 8일 한국에 진주한 미군은 인공을 아예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미군정을 수립하고 미군정을 남한의 유일 정부로 천명하며 직접 통치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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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군중 앞에서 단결을 호소하는 여운형(1945.8.16.)(좌) / 신탁통치 반대 전국대회의에서 연설하는 김구(우)


한국인의 자치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던 미국

미국 정부는 애초부터 한국인의 자치능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연합국에 의한 장기간의 신탁통치를 통해서 한국인의 자치능력을 키우고 서서히 자신의 정치경제체제를 닮은 신국가를 건설하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한국인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나온 정책이었다. 좌·우 할 것 없이 한국인 대부분이 즉각적인 독립을 원하고 있었고, 건준·인공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인들은 이미 충분한 자치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한 현지의 미군정은 본국 정부의 신탁통치정책을 폐기하고 남한 정계를 우익 중심으로 재편하여 우익이 주도하는 과도정부 수립정책으로 변경하고자 했다. 통일정부의 수립은 그 이후 남북에 구성된 각각의 과도정부 간 협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남한에 먼저 과도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분단을 고착화할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미군정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의안에 신탁통치안이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미군정은 신탁통치안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발을 정치공작으로 돌파하고자 했다. 남한 언론들이 오보하도록 하여 마치 소련이 신탁통치안을 주장한 것 인양 대대적으로 보도케 한 것이다. 여기에 이미 신탁통치안이 미국 정부의 고유 정책임을 잘 알고 있었던 우익 정치세력들이 이제야 새롭게 알게 된 것 인양 뛰어들어 판을 키웠다. 남한사회는 반소·반공에 입각한 신탁통치반대운동으로 들끓었다. 이를 통해 미군정은 남한 정계를 우익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했고, 우익 정치세력들은 자신들의 세력 확대에 적극 활용했다. 


신탁통치반대운동으로 심화된 남북·좌우의 갈등

소련군사령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소련은 미국의 장기적인 신탁통치안에 맞서 먼저 조선임시정부를 조직할 것과 되도록 신탁통치는 짧게 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먼저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처럼 선전되자 크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군은 민공연립노선에 입각하여 조만식을 수반으로 하는 조선임시정부의 수립을 바랐다. 물론 최종적인 목표는 자신들을 적대하지 않는 친소정부의 수립이었다. 하지만 남한의 신탁통치반대운동으로 그들은 경직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신탁통치반대운동을 계기로 반소적 태도를 보인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연금하고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참여한 남북의 모든 우익인사들을 반민주주의자로 비난했다. 그들은 더 이상 민공연립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남북의 주요 우익 인사들이 대부분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참여하였으므로 이것은 사실상 민공연립노선의 폐기를 의미했다. 이때부터 북한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선 ‘민주기지론’이 널리 퍼졌다. 북한에 먼저 혁명의 근거지를 만들어 장차 한반도 전체로 혁명을 전파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민주기지론은 북한에 먼저 권력기구를 만들자는 것이었으므로 곧바로 분단정부의 수립 논리로 전환될 수 있었다. 

결국 미군정과 소련군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일을 했다. 미군정은 남한에 과도정부를 지향하는 민주의원을 조직했고, 소련군은 북한에 중앙정권기관을 지향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우고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그렇게 미소가 남북에 각각의 기반을 다진 후에 모스크바결의안에 입각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가 열렸다. 미국은 모스크바결의안에 그대로 따르는 것은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되도록 3상회의 결의안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변형시키기를 원했다. 그들은 민주의원을 미소공위의 협의대표기구로 삼고 북한의 대표기구와 협상하여 임시정부를 구성하고자 했다. 반면 소련은 모스크바결의안을 수정 불가능한 최종 결정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모스크바결의안을 어떤 변형도 없이 그대로 실천하기를 원했다. 서로의 생각이 이리 다르니 협상이 잘 될 리 없었다. 결국 미소공위는 무기한 휴회에 들어가고 말았다. 

미소공위의 휴회는 분단의 고착화를 의미했다. 영구분단의 위기에 직면하자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우합작운동을 벌여 남북좌우의 통일을 통한 민족통일정부의 수립을 도모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때부터 단독정부 수립을 외치기 시작했다. 미소공위의 휴회 이후 미군정은 좌익 탄압을 본격화하는 한편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지원하면서 부실한 민주의원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 대체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군정은 남조선과도정부의 수립을 선포했다. 소련군도 미소공위 휴회 이후 북한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중요산업 국유화 등 사회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보안간부 훈련대대부라는 위장 명칭으로 정규군대의 창설을 위한 최고참모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각 단위 선거를 거쳐 1947년 2월 그동안의 ‘임시’라는 명칭을 떼고 정식으로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렇듯 미소 양국이 각각의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한 후 제2차 미소공위가 열렸다. 양측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에서 제2차 미소공위가 잘 될 리는 만무했다. 이미 미소의 갈등은 한반도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7월 19일 여운형의 암살은 제2차 미소공위의 결렬을 암시하는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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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공동위원회 개막(1946)(좌) / 좌우합작위원회 기념사진(1947.12.10.)(우)

분단의 길 끝에 찾아온 전쟁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후 미국은 한국 문제를 UN에 이관했다. 유엔 감시하 인구 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통해 신정부를 수립한다는 방침이었다. 여기에 소련이 찬성할 리 없었으니 사실상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방안이었다. 미국이 굳이 UN에 한반도 문제를 이관한 것은 천년이 넘도록 단일국가였던 한국을 분단시켰다는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하여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끝까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시도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1948년 5·10선거를 통해 국회를 구성하고 7월 17일 헌법 제정을 거쳐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북한 역시 미리 헌법 제정 등 제반 준비를 해놓았다가 남한 정부 수립 이후인 8월 25일 총선거를 통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고 9월 2일 최고인민회의를 개막해 헌법을 공식 채택하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로써 한반도에는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두 정부는 스스로를 중앙정부라고 규정하면서 상대방을 불법적인 정부로 매도했다. 대한민국은 한반도 전체를 영토로 한다고 선언했고, 북한은 서울을 수도로 규정했다. 이와 함께 기나긴 체제 경쟁이 시작됐다. 양측의 경쟁은 이내 극단적인 대결로 치달았다. 정부 수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은 ‘국토완정’을 주장했고, 남측은 서슴없이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는 순간 수많은 사람이 예견했듯 한반도에는 ‘내전 같은 국제전쟁’이자 ‘외전 같은 동족전쟁’의 기운이 만연했다. 그렇게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전쟁이었지만 끝내 우리는 그 전쟁을 피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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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행사(1948.8.15., 중앙청)(좌) / 5·10선거(1948)(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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