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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좌우의 통일을 원했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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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한성(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남북·좌우의 갈등으로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생을 던져 민족을 구원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각자가 꿈꾸는 신국가를 만들기 위해 뜨겁게 뭉치고 격렬히 싸웠다. 그들이 생전에 남긴 연설 내용을 들여다보며 그들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였으며, 어떤 민족을 만들고자 했는지 되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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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여운형, 김규식, 김구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조선신민당 지도자였던 백남운의 말을 빌리면 광복 후 우리 민족은 ‘민족국가 수립’과 ‘사회혁명 완수’라는 이중의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좌우가 함께하는 좌우연립정부를 수립해야 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세계자본주의와 세계공산주의의 대립이 시작되던 광복 후 3년의 역사에서 민족 지도자들은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 대표적 민족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여운형은 우리 민족의 자치 능력을 증명하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 등을 조직하고 4당회담과 좌우합작위원회 등을 통해 좌우의 역량을 모으고자 했다.        


“해방의 날은 왔다. 이제 민족해방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으니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은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자. 개인적 영웅주의는 모두 버리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1945년 8월 16일, 광복을 맞이하여 경성에 모여든 군중 앞에서 여운형은 이같이 발언하였다. 아무리 미소 양국의 규정력이 강했다고 하더라도 우리 민족이 좌우로 나뉘지 않았다면 분단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광복 후 여운형의 첫 일성은 그런 점에서 새롭게 다가온다. 우리가 개인적 영웅주의를 모두 버리고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갔다면 우리 민족은 정말로 분단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단결만이 분열을 막을 수 있는 해법이라는 것을 여운형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승만도 기회가 될 때마다 단결을 외쳤다.       


“나는 항상 우리 민족의 자유를 얻고자 애써왔으며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여러 나라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오늘까지 싸워온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자유를 얻기 위하여 정당의 분열과 40년간 일본제국주의의 탄압으로 찌들어온 당파적 정신을 털어버리고 우리의 주의·주장을 버리고 오직 통일되어야만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의 통일은 여운형의 것과는 달랐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깃발 아래 통일되기를 원했다. 설사 그것이 또 다른 분열을 의미한다고 해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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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준비위원회 시절 연설 중인 여운형

통일국가 건설에 끝까지 노력하자 

“우리 같은 지도자층이 없었던들 조선의 통일은 벌써 성공하였을 것이다. (…)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자세히 모르고 덮어놓고 피로 싸운다는 것은 너무 경솔한 짓이다. 3상회의는 단순한 조선 문제만이 아니고 전 세계적 문제이므로 개중에 지지할 점도 있고 배척할 점도 있다. 덮어놓고 지지한다는 것도 너무 지나친 처사이다. (…) (지도자들이) ‘탁치’라는 문제를 정확히 파악치 못하고 대중을 어지럽게 하는 것은 큰 과오다. 과거에는 정당 싸움으로 민중을 두 갈래로 분립시켰던 것을 이번엔 탁치를 이용하여 민족을 재분열시킨 것은 중대한 과실이다.”      


신탁통치파동이 남북·좌우의 갈등을 촉발했을 때 여운형은 자신을 포함하여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갈등을 유발하는 행태에 대해 이렇게 한탄했다. 갈라치기를 통한 지지세력의 확보라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남북·좌우의 갈등은 점점 심각해졌지만 여운형과 함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남북·좌우의 통일을 위해 힘썼던 사람도 있다. 바로 충칭임시정부의 부주석이었던 김규식이었다.       


“우리가 통일된 민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데 설혹 제2, 제3의 진로가 있다 하더라도 대전 이래 모든 국제공약과 국제관계를 고찰한다면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과로 된 미소공위에 의하여 우리의 목적을 달함이 가장 편하고 빠른 길이라고 하겠다. (…) 우리는 미소공위가 우리 국가 건설에 전폭적 협력을 절실히 하기를 바라는 동시에 미소 양 대국 간에 소소한 고집과 논란이 있더라도 그것을 배제하고 급속한 기한 내에 우리로 하여금 번영한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데 전력 매진하도록 하여줄 것을 심신(深信)하며 우리는 좌우와 남북이 일치단결하여 천재일우의 이 호기회를 놓치지 말고 3천만 겨레가 한 가지로 결심하고 노력하기를 바라고 믿는다.”


이처럼 김규식은 미소공위가 재개되자 미소 양국이 소소한 고집과 논란이 있더라도 참고 통일국가 건설에 끝까지 노력해줄 것과 남북·좌우가 일치단결하여 이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나 미소공위가 다시 공전되자 그는 이렇게 한탄했다.     


“마샬, 몰로토프 양 외상이 절충을 거듭하여 재개된 미소공위가 금차에도 협의 대상 문제로 정돈상태에 빠졌다는 것은 작년의 휴막(休幕)을 재연하는 것이 아닌가? (…) 만일에 금번 공위가 성공을 한다면 차라리 한인이 갈망하는 독립만이라도 승인하고 정부는 한인의 손으로 수립케 하였어야 할 것이며 한국을 원조한다면 연합국이 적당한 협정 하에 얼마든지 원조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 민족이 완전 자주독립의 즉시 실현을 바라본 마음은 3,000만 동포가 다 같이 일일천추(一日千秋)와 같다. 그리고 민주조국 재건에 있어 연합국의 원조를 바란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사전을 보더라도 탁치가 곧 원조나 협력이라는 정의는 없느니 만치 유독 한국에 대하여만 한인이 증오하는 탁치란 명사를 쓸 필요는 무엇이었는가?”     


신탁통치문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남북·좌우의 통일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자 유독 왜 한국에서만 그 말을 써서 문제를 야기한 것이냐고 한탄하는 말이다. 하지만 김규식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김구와 함께 단독정부의 수립을 반대하며 흔히 남북협상이라 부르는 남북요인회담에 나서 마지막까지 남북·좌우의 통일을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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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식에서 연설 중인 김규식(1946.12, 중앙청)

전쟁을 막기 위하여

“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 삼천만 동포 자매 형제여! (…)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明察)하고 명일(明日)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 번 더 심환(深患)하라.”   


김구가 38선을 넘기 전에 발표한 글이다. 뒤늦은 선택이었지만 그런데도 그는 김규식과 함께 북한에 가서 김일성과 마주 앉았다. 김일성은 이 만남을 끝까지 북한 정권 수립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활용하려고 했지만, 김구·김규식은 남북·좌우의 통일을 위한 마지막 시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목적은 이것이었다. 당시 지각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던 전쟁, 그 전쟁을 막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남북요인회담 후 발표된 공동성명서 제2항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외군 철군 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음을 약속할 것.’ 그러나 김일성은 끝내 그 약속을 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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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협상 회의에서 축사하는 김구(1948. 4. 22. 평양 모란봉극장)

광복 후 3년 그리고 광복 후 77년 

광복을 맞은 한반도의 허리가 끊긴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48년이었다. 당시 남한과 북한은 외세의 분할점령 끝에 하나의 정부가 아닌 각각의 정부를 수립했다. 여기엔 이념 대결이 치열했던 시대적 배경과 함께 ‘지도자’로 추앙받은 이들의 엇갈린 운명이 크게 작용했다. 광복 후 3년은 결코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과 닿아있는 밀접한 역사다. 씁쓸함이 느껴지더라도 알아야 할, 그리고 앞날의 발전을 위해 반성할 부분은 반성해야 할 엄정한 역사다.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특히 근현대사를 아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를 이해하고, 발전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세워졌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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