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개인자격으로 환국했으나 임시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환호는 열렬했습니다.
연합국환영회 본부가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영회에 3만 여명의 인파가 모였고, 전국 곳곳에서 임시정부 귀국 환영 행사가 열렸지요. "임시정부 환영!" "고생 많았습니다." "김구 주석 환영!"
환국 후 임시정부 전 각료가 김구의 거처인 경교장에 모여 국무회의를 개최하는 것으로 임시정부는 공식활동을 시작했고 미군정 외의 그 어떤 정부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미군정과 갈등이 생겨났지요."정부로서의 활동은 분명히 안된다고 했는데.. 흐음.."
1945년 12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만난 미, 영, 소 3국 외상이 한국에 대해 5년간의 신탁통치를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임시정부는 미, 영, 소, 중 4개국 원수에게 결의문을 채택해 발송하고 정당, 종교단체, 언론단체 대표들을 초정해 비상대책회의를 여는 등 반탁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원한다!" "신탁통치는 제2의 식민지배다. 신탁통치 반대!"
김구는 '남의 손을 기대할 것 없이 우리의 손으로 과도정권을 수립하자'고 주창하고 과도정권 수립을 위한 기구를 결성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상국민회의입니다. 이는 임시정부의 국회 역할을 하던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것으로 각계 인사 195명이 여기에 참가하였습니다.
국민의회 - 비상국민의회 독립촉성국민회 민족통일본부 한국독립당
그로부터 한달 뒤, 비상국민회의를 중심으로 민족 세력을 결집해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여기서 과도정권 수립을 추진했습니다. 1947년 3월 과도정권의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김구가 추대되었지요. "우리 이제 떳떳하게 정부로서 활동해봅시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이승만의 사의표명으로 과도정권은 더 이상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미군정과 합작해서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갑자기 주석직을 내놓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1947년 들어 냉전체제가 성립되면서 유엔은 남북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후에 미 소 양군을 철수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당시 국론은 두 가지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공산당들과는 연합하지 말고 남한만의 정권을 세워야 합니다!" "삼천만 동포가 손잡고 통일조국을 건설해야 합니다!"
그러나 소련 측은 유엔위원단이 38선 이북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엔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결정할 수 밖에 없었지요.
임시정부는 북측에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의해, 4월 19일부터 열린 남북협상에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 합의는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5월 10일 유엔감시단 감시 하에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지요.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경국 남북의 형제들은 앞으로 총칼을 들고 서로를 대하게 될게 분명하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8월 15일 남한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9월 9일 북한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나는 미국과 소련이 그어놓은 38선이라는 장벽을 경계로 국토와 민족이 분리되고 말았습니다. "남과 북은 언제쯤 나처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까? 쯧쯧..."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의 국호, 연호, 헌번을 계승하여 재건되었고, 임시정부와 광복군 지도자들은 정부와 국군 성립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민구의 뿌리이자 기원이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1919년부터 시작. 대한민국 헌법. 임시정부-국호, 연호, 임시정부 헌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