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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
연도 : 1995 전시 날짜 : 05.02~07.30 전시 장소 : 특별기획 전시실 작성자 : 홍보문화부 작성일 : 2013-08-14 조회수 : 1,022

문화재 파괴와 약탈

제는 1910년 한국을 병탄하고 조선총독부 내무부 산하에 '고적조사반'을 설치하고 서울· 개성·평양·부여·공주·경주 등지의 수많은 고분·산성·고적을 파괴하고 출토문화재들을 일본으로 실어갔다. 일제가 우리의 전통 문화재를 파괴하고 약탈했던 목적은 우리민족의 찬란했던 문화와 민족사를 은폐하려는데 있었다. 결국 일제의 문화재 파괴와 약탈은 한국사의 왜곡작업과 궤를 같이한다.


일제가 약탈해간 문화재는 도자기· 불화·회화·서적·불상· 석조물 등 모든 종류에 걸쳐 있었다. 일제가 파손한 문화재는 주로 한일관계사에서 일본에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일제는 1943년 치안유지를 명분삼아 20개 비석을 파손 철거하였던 것이다.


현재 일본내에서 한국 문화재를 다소 소장하고 있는 기관으로는 고려미술관·대판 시립 동양도자기미술관·대창집고관·근진미술관·동경 국립박물관·경도 국립박물관 ·경도대학 도서관· 동양문고 ·궁내 청서릉부 (宮內 廳書陵部)궁내청서릉부· 산구현립(山口縣立) 여자대학등이 대표적이다.













경복궁에 건립된 조선총독부 청사



















▶ 동소문· 수구문 철거 보도 기사

(『동아일보』1927.7.12)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으로 헐리는

경복궁 담
























◀ 융문당·융무당 철거 보도 기사

(『동아일보 』,1928.8.13)

























광화문을 철거하는 광경





















일제가 일본으로 옮겨간 경복궁 자선당(일본 동경)






















◀ 일제가 종묘와 창경궁을 분리할 목적으로

낸 도로. 왕궁 수난사를 상징하고 있다.





















수항루.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때 왜군으

로부터 이순신 명량대첩비(해남) 항복을

받았던 곳인데 일제때 철거되었다.














일제가 치안을 명분으로 파괴,철거한 비석 분포도



1943년 일제는 치안유지를 명분으로 전국의 20개 비석을 철거하였다.

비석에는 주로 조선이 일본과 싸워 승리했던 사실이 기록되어있다.




일제가 파괴 혹은 철거한 비석들. 일제는 1943년 치안유지를 명분으로 전국의 20개 비석을 철거하였다. 비석에는 주로 조선이 일본과 전쟁에서 승리했던 사실들이 기록되어있다.



















▶ 사명대사 석장비 (합천해인사)


































이순신 명량 대첩비(해남)




행주 전승비 (고양)





































◀ 김시민 전성각적비(全城却敵碑 )와

촉석 정춘단비(진주)


























황산대첩비(남원)




















































▶ 이순신 좌수영 대첩비 (여수)

















































▶ 충장공 정발 전망(戰亡)유지비(부산)







<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회화류 >






















◀ 연화도(蓮華圖),강세황 작,

18세기, 민예관 소장






















▼산수도(山水圖),김득신 작,

김용두(재일교포) 소장

구자도(拘子圖), 이엄필 작,

16세기, 민예관 소장

























산종정월도(山鐘汀月圖 ), 강세황, 김용두 소장






























































묵란도(墨蘭圖),이하응 작,

1897, 김용두 소장



소금도(小禽圖), 김지 작,

16세기, 김용두 소장


































































여래입상, 통일신라,

대마도 해신신사(海神

神社) 소장, 중요문화재
금동여래입상,

극락사( 極樂寺 ) 소장
여래입상,통일신라,복강

시(福岡市) 미술관소장
일광삼존상,삼국시대,

동경 국립박물관 소장
































미륵보살반가상,삼국시대,

동경 국립박물관 소장.
여래입상,통일신라,

경도(京圖) 국립박물관

소장
미륵보살반가상,삼국시대

관송원(觀松院) 소장
삼존입상,삼국시대,

근진(根津)미술관관 소장




















대창집고관(大倉集古館)[東京],한국 불상··석탑 ·도자기를 소장하고 있다.

고려미술관[京都], 한국문화재가 집중 보관되어있다.




























관경변상도,1323년,지은사(知恩寺)소장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고려,

서복사(西福寺) 소장

관경변상도,1465년,지은원(知恩)소장


















수월관음보살도, 서복사(西福寺) 소장, 중요문화재















아미타여래도,고려, 경도 국립박물관 소장,중요문화재



























관경변상도,1323년,지은원(知恩)소장,중요미술품

관경서분변상도(觀經序分變相圖),고려,

서복사(西福寺) 소장

지장보살도,고려,자하현립(滋賀縣立)

비파호문화관(琵琶湖文化館) 소장,

현 지정문화재.







< 일본에 소장되어있는 도자류 >





















백자청화매회문호,

18세기 전반,

민예관 소장



진사연화문팔각병

(辰砂蓮花文八角甁),

18세기,대화(大和)문화관 소장
청자상감진사운학문합자

(靑磁象嵌辰砂雲鶴文合子)

11-12세기,대화문화관 소장



청자투조당초문수상

(靑磁透彫唐草文手箱),12세기

대판시립

동양도자기미술관소장

















청자상감당자포도문표형수주(靑磁象嵌唐子葡萄文瓢形水注),13세기,

대판시립 동양도자기미술관 소장















청자상감매죽수금문매병,11-12세기, 동경 국립박물관 소장



































청자연당초문정병(淨甁),11-12세기,

근진(根津)미술관 소장

청자 상감 운학매병, 12세기,민예관 소장

청자상감 절지문(折枝文)수주, 고려,

안택콜랙션 소장




청자목단 당초문 표형수주(瓢形水注),

12세기, 출광(出光) 미술관 소장






























조선시대 문신(文臣) · 무신(武臣)석상,

경도(京都) 차아야(嵯峨野)소재
경도 국립박물관에 전시중인

조선시대 석상(石像)






















일본에 밀반출되었다가 되돌아온

봉인사 사리탑































일본에 밀반출되었다가 되돌아온

경천사지 10층석탑




경도(京都) 고려미술관에 전시중인

조선시대 석탑














일본에 밀반출되었다가 되돌아온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한국 고도서가 다수 소장되어 있는 동양

문고. 총독부 관리를 지낸 전간공작(前間

恭作)이 수집, 기증한 조선본(朝鮮本)

1,700여점이 보관되어있다.




























일본정국신사(靖國神社)에 보관중인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동경 국립박물관에 전시중인

백제시대 유물




















『대창집고관(大倉集古館)오백선,』1994.


< 일본 소재 한국 문화재 관계 도록.목록류>























『동양도자전』,동경 국립박물관, 1978





『동양 도자의 전개』, 대판 시립 동양도

자미술관, 1990.
『안택콜렉션 동양도자전』, 경도 국립 박물

관 ,1978



『고려의 금속기와 도자기』,대판 시립 동양도

자미술관, 1991.































『이조(李朝)도자』,

대판시립 동양도자미술관,1993.





『경도 국립박물관소장품 도판(圖版)

목록』,(회화편),1989.
『이조(李朝)의 문방구(文房具)』,

대판시립 동양 도자미술관,1994.



『경도 국립박물관소장

고려이조의 도자』,1988.





























『고려미술관 개관기념도록』,1988.







『일본(민예관)소장 한국 문화재』,

한국국제교류재단,1993.민예관 소장 한국

문화재 300여점 수록.
『일본소재 한국전적목록』,문화재 관리국

문화재 연구소 , 1991.일본 도서관 20여개

소에 소장된 우리나라 전적류 목록



『김용두옹 수집문화재 귀향 특별전 』,국립

중앙 박물관, 1994.재일교포 김용두옹이 소

장하고 있는 250여점의 중요 문화재 수록.

































『고려,영원한 미 -고려불화특별전』,호암

갤러리,1993.일본에 소재한 고려불화 15점

이 소개되어있다.





『해외소재 한국문화재목록』,문화재관리국

문화재 연구소, 1993.
『해외소재 한국문화재목록』, 문화재관리

국,1984.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황수영,1973.



















일제가 전국 명산에 꽂은 쇠말뚝 분포도









일제의 황민화 정책

제는 1910년 이래 한국인을 일본 '국왕'의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정책을 추진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후 일제는 더욱 가혹하게 황민화 정책을 강행하였다.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 구호를 내세워 한국인을 일본 국왕의 노예로 만들고자 하였다.


황민화 정책 가운데 '황민화 교육'은 중접 사업이었다. 황민화 교육은 일본어 상용(常用), 사상통제 강화, 전쟁에의 동원, 황국신민의 단련 등의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교육 정책은 '황민화 정책 월중 행사 계획'에 따라 철저하게 시행되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신사참배, 동방요배, 군사교육,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의 암송, 정오묵도 등을 강요하였다. 이에 불응하는 학교는 폐교되었을 정도로 황민화 정책은 폭압적으로 추진되었다.


일제의 황민화 정책은 식민지 지배의 일반적 상황위에 전시체제의 특수상황이 중첩되어 추진된 식민지 약정(惡政)이었으므로 한국인에게는 이중의 큰 고통이 되었다.






















일본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조봉

대일(大詔奉戴日 )의식
모든 각급 학교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 세

워진 황국신민서사탑. 일본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이다.
전국 곳곳에 세워진 내선일체 (內鮮一體)

비석,내선일체란 일본과 한국은 한 몸이

란 뜻인데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同

化)하려는 기만적인 이론이다.


























황운부익(皇運扶翼 )비석























일본식 예절 교육 실시 광경

















'황국신민' 체조


























궁성요배 강요 전단.궁성이란 일본에 있는'국왕'을 향해 절을 하는 의식이다.



















『갱생지도일지』, 김도석( 金道錫 ),

북천 공립 보통학교
『조선통치의 목표』,

석삼구미(石三久彌), 1932





































황국신민서사탑 기반 공사에 깔았던 돌














『조선』,조선총독부, 1944
'부여신궁의 건립을 위해 국민들로부터

염출'한다는 보도기사

(『매일신보』,1941.9.19.)



































'반(反) 내선일체 운동은 엄중 취체'

보도기사 (『매일신보』,1941.4.1.)





















'황국신민서사주' 제막식 보도기사

(『매일신보』,1941.4.12.)










일본 종교의 침투

제는 1936년 11월 제령(制令) 제 19호로써 조선민사령을 개정하고 1940년 8월 10일까지 한국인의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꿀 것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한국인이 성명을 변경하지 않을 경우 사회활동을 할 수 없도록 갖가지 제약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등록 기한 내에 약 322만호(80%)의 한국인이 일본식 성명으로 변경하였는데 이러한 일제의 철저한 탄압정책에 항거하여 일부 한국인은 자결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는 일상 생활에서 우리말 대신 일본어를 상용(常用)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 민족을 말살하려는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1943년 일제는 일본어 보급정책을 더욱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국민학교 부설 일어강습소 개설, 각종 강습회 개최, 『국어교본』(일어)의 배포, 잡지에 의한 강습, 1일 1어(語)운동 등을 추진하였다.

























일본 신도(神道)보급의 총본산인

조선신궁(남산)






































조선신궁 건립으로 인해 파손된 남산


























평양신궁
'신사 불참배시 단연 폐교

명령' 보도 기사

(『동아일보』,1937.9.8)
'신사불참배 학교 폐교 '

보도기사

(『동아일보』,1937.9.8)


























일본 명치신궁 참배에 동원된

한국 학생들





















조선신궁 참배에 강제 동원된 학생들






















일본 불교 침략의 대표적인 사찰인

동본원사 별원(부산)































금강교 포교소













일본 종교인 천리교 포교소




















일본 불교인 일련종 사찰

















기독교 침략에 앞장섰던 조합교회(평양)
































'내선일체'의 구현을 위해 부여신궁을

건립한다는 보도기사

(『매일신보 』, 1941.1.4.)





성명말살(창씨개명), 한국어 말살



제는 1936년 11월 제령(制令) 제 19호로써 조선민사령을 개정하고 1940년 8월 10일까지 한국인의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꿀 것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한국인이 성명을 변경하지 않을 경우 사회활동을 할 수 없도록 갖가지 제약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등록 기한 내에 약 322만호(80%)의 한국인이 일본식 성명으로 변경하였는데 이러한 일제의 철저한 탄압정책에 항거하여 일부 한국인은 자결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는 일상 생활에서 우리말 대신 일본어를 상용(常用)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 민족을 말살하려는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1943년 일제는 일본어 보급정책을 더욱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국민학교 부설 일어강습소 개설, 각종 강습회 개최, 『국어교본』(일어)의 배포, 잡지에 의한 강습, 1일 1어(語)운동 등을 추진하였다.
























일본어 강제 교육 광경▶






부녀자들에게 까지 강요된 일어 교육▶



조선어학회 사건 때 수난당한 인사들.일제는 한국어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1942년 한글 연구학회인 '조선어학회'인사들을 대거 검거하였다.


































'일본어 상용' 홍보 포스터 일제의 한글 사용 금지 조치를 비판한

신문 삽화(『동아일보』,1925.3.25.)
'조선어 과목 교수 폐지'보도 기사 (『조선일보』,1938.4.1)

























▲ 1940년 일제가 한국어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폐간시킨 한글 간행물들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된 호적들

▼일어 교육에 치중된 조선 총독부 교육정책을

비판한 신문삽화(『동아일보』, 1924.2.12.)





























◀ '창씨개명'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


일본식 지명으로 변경된 서울 거리 명칭




한국 역사의 왜곡

제의 식민주의 사학은 그들의 한국 침략을 이론적으로 합리화하고, 한국인의 열등감을 조성하여 독립정신을 근저에서 제거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식민주의 사학은 대체로 타율성론(他律性論)·정체성론(停滯性論)·일선동조론(日鮮同組論)의 세가지 논리로 정리된다. 타율성론은 한국사회는 고대로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로 출발하였으며 그후의 역사도 계속 식민지적 상황으로 전개되었다는 허황된 논리이다. 정체성론은 한국역사에서는 발전적 역사상을 찾아 볼 수 없으며, 1900년대 한국 상황은 일본의 10세기 역사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논리이다. 일선동조론은 한국인과 일본인은 본래 같은 민족이란 논리로서,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희석시키기 위한 이론이다.


이와 같은 허황된 식민주의 사학 이론들은 역사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비문학적 내용이지만, 한국인에게는 민족 열등감을, 일본인에게는 근거없는 우월감을 조성하였다.

























일제가 '임나일본부설'의 조작을 위해

훼손한 광개토대왕릉비








































일제가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1939년 4월 경북 고령에 세웠던 임나대가야국 성지 비석





























단군 역사의 말살을 위해 철거시킨

서울 남산의 국사당









발매금지되었던 역사서적들


'구월산의 단군 성지(聖地) 불하

(拂下)' 보도기사

(『동아일보』, 1928.6.13.)


< 식민주의 사학저술 >




































『조선개화사 』,항옥성분 ,1904.








『신라사』, 복전방지조()1913
























『조선 사천년사』, 청유강태랑()1914.▶























조선사강좌』, 조선사학회,1924









『조선사학』(2호),

조선사학 동고회, 1926.
『조선병합사』,석미춘양(釋尾春芿), 1926









































『조선급 조선민족』,

조선사상통신사, 1927.






『경성천도론』,

풍천선엽 (豊川善曄) ,1938.
『조선사』,조선사편수회,1931-1937

식민주의사학의 대표적인 저술로서 식민주의 사회적 요소들만 적출하여 만든 자료집.










































『만선문화사관』,

,조산희일(朝山喜一 ),1935










『조선학논고』(2호),

등전량책(藤田亮策), 1936.




『개관조선사』,

,궁기오십기(宮崎五十騎), 1937








































『고려사 연구』,

금서룡 (今西龍) , 1944.






『조선사의 길잡이』,

조선총독부 ,1939.
『조선사의 간 』,금서룡(今西龍),1945.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

제의 식민주의 교육은 이미1906년 통감부 설치시기부터 추진되고 있었다. 일제는 침략의도를 감추면서 '일본은 문명국이고 한국은 미개국' 이라는 차별성을 앞세워 한국을 문명화시킨다는 명분아래 '동화정책(同化政策)'을 추진하였다.


일제는 식민지 정책중 교육정책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다. 일제는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는데 요지는 한국인을 일본 '국왕'의 '충량'한 노예로 양성할 것, 일본어를 시급히 교육하여 일본인으로 '동화(同化)'시킬 것, 단순한 기능인을 양성하는 실업교육에 중점을 둘 것 등이었다.


일제는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던 사립학교를 탄압하면서 그들이 세운 관·공립학교를 중심으로 강압적인 식민지 노예교육을 실시하였다. 교사들은 칼을 차고 제복을 입고 위협적인 모습으로 교단에 섰다.


일제의 식민주의 교육정책은 '일시동인(一視同仁)',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기만적 이론을 앞세워 한국인의 우민화(愚民化)·노예화·친일화를 획책한 것이었다.























◀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치'에

대해'착취정치'라고 비판한

보도기사

(청년조선,1928.7.7.)



▼ 제복입은 교사에 의한 '황국신민교육' 광경






































'조선 사람을 어리석게 만드는 조선 교

육제도' 보도기사 (동아일보,1920.5.7.)







식민지 군사교육을 비판한 신문 삽화


(동아일보, 1924.11.27)
































'일제의 교육억제정책'을 비판한 신문 삽화 (동아일보,1924.4.8)▶


































▲ 친일 관리 양성의 중추 기관인 경성제국대학





▼ '국민학교의 신(新)발족' 보도 기사

(매일신보,1941.4.1)


▼ '국민학교의 목표는 황국신민의 연성

(鍊成)'보도기사(매일신보,1941.4.1)


























'대학에서 사상 전문의 감독관 설치'

보도기사 (중외일보 1928.4.15)▶




『조선의 교육연구』

조선초등교육연구회, 1931.


『문교의 조선』,조선교육회,1940.



































◀『고등보통학교수신서』,

조선총독부,1923.

『신편 고등조선어급 한문독본』(5),

조선총독부,1926.

『초등지리서』, 조선총독부,1933.





























『초등국사』, 조선총독부, 1942.









『충량지도』, 교육협성회, 1928.


『학생일기』,청주제일 공립중학교,1943.







한민족의 문화말살정책

일제는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차지한 후 식민지 수탈 뿐만 아니라 한국민족을 지구상에서 조멸시키기 위하여 치밀하게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폈다.


세계 제국주의의 약소민족 침략사에서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한민족 문화말살정책을 통해 한국인으 민족적 자부심을 파괴하고, '동화(同化)'라는 명분아래 한국과 한국인의 존재를 역사무대에서 완전히 소멸하고자 하였다.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은 다양한 형태오 추진되었으나 대체로 식민주의 교육정책,역사왜곡(식민주의 사학), 신도(神道)를 비롯한 일본 종교의 침투, 한국어 말살·성명말살(창씨개명), 황민화(皇民化) 노예정책, 문화재 파괴와 약탈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은 초기에는 주로 식민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개되었으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침략 전쟁 수행을 위한 경제 수탈에 더 비중이 두어졌다. 따라서 민족말살정책의 심도는 더욱 강화되어 , 우리말 대신 일본말을 사용하게 하고,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도록 강요하는 등 극단의 극단의 지경까지 이르렀다.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열등감과 자괴감에 빠져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발간사

올해는 광복5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입니다. 특히 선열들의 독립운동 관계 연구와 전시를 주요 업무로 하고 있는 독립기념관의 관장으로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오직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애국 선열들과 오늘의 감회를 같이하고 싶은 심정 간절합니다.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독립기념관에서는 중경 임시정부청사 복원, 독립운동사 사전 편찬, 독립둔동사 학술심포지움 개최, 특별기획전시회 등 선열들의 업적을 올바로 규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중요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본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 특별기획전」도 이러한 광복 50주년 사업의 일환입니다.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민족 통일을 위한 미래 지표를 올바로 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바른 인식 없이 미래를 조감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정확한 역사인식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중요한 과업입니다.

일본제국주의는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잔혹한 식민지 통치였던 사실은 이제 많은 분들이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일제의 한국 식민통치가 잔혹했다는 논거는 바로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식민지 통치에 있어 군사적·정치적 탄압, 경제적 약탈은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일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 민족을 일본인으로 '동화(同化)'하여 지구상에서 영원히 소멸(消滅)하려고 획책하였습니다. 일제의 한국 식민지 통치가 세계 역사상 유래를 볼 수 없는 잔혹한 통치라고 비판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은 이러한 일제 식민통치의 잔혹성을 국민들에게 정확히 알리기 위해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 특별기획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이 전시회는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을 주제로 한 최초의 전시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기도 합니다. 전시회를 통해 일제 식민통치의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고 나아가 민족 발전을 위한 올바른 좌표를 설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합니다.

1995 . 5

독립기념관 관장 최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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