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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의 한민족 조국 독립 운동
연도 : 1995 전시 날짜 : 08.15~10.31 전시 장소 : 특별기획 전시실 작성자 : 홍보문화부 작성일 : 2013-08-14 조회수 : 821

편집후기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찾기란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오늘날의 발달된 교통수단으로도 힘들고 어려운 여정이었습니다. 특히 만주나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독립군 유적지는 차편보다는 걸어야 했던 곳이 적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찾았던 독립군의 근거지와 전투지는 예외없이 깊은 산간오지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청산리·봉오동을 비롯하여, 유하현의 삼원보(三源堡)·압록강변의 하로하(下露河)·고마령(古馬嶺) 등까지 장백산맥의 줄기를 따라 유적지를 답사하였습니다. 거기에는 꿈에도 사무치는 두만강과 압록강이 굽이치고 있었고, 이제껏 금단의 땅인 북녘의 강토도 손에 닿을 듯 했습니다. 지금도 독립군의 함성과 군가가 들릴듯한 그곳에서, 광복 50주년을 곱씹어 보고 민족 분단의 아픔을 달래야 했습니다. 그리고 민족통일의 길은 독립운동의 그 정신에서 찾아야만 된다는 것을 피부깊이 느끼기도 했습니다.


우리 조사팀은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독립운동의 유적지를 다 찾아 보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의 10분의 1이나 차지하는 해외 한인동포사회의 배경은 독립운동 역사와 유래를 같이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동북지역과 관내·러시아의 연해주와 중앙아시아·미국의 본토와 하와이·멕시코, 그리고 일본에 이르기까지 한인동포사회의 역사에는 독립운동의 숨결이 함께 하던 곳입니다. 때문에 남의 땅이지만 우리의 역사가 살아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찾아야 하고, 또 오늘날의 우리에게 밝혀져야 한다는 뜻에서 이번 특별기획전을 기획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여건이 미처 따르지 못하여 부족한점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이번 특별기획전의 자문을 맡아주신 윤병석 선생님(인하대 사학과 교수)의 배려와 도움에 힘입어 이만큼이라도 내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수 만리 이국땅에서 오로지 동포의 정으로 아낌없는 협조를 해주셨던 여러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담당연구원 채영국

일본 및 네덜란드.대만지역의 독립운동

침략자들의 본토인 일본에서의 독립운동은 다른 국외지역에서의 투쟁보다 한결 힘든 것이었다. 일본지역 자체가 투쟁의 목표이었기 때문에 대상은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었지만,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독립운동을 추진시키기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어려움을 감내하며 독립운동을 실천한 사실을 살펴보면, 먼저 1919년 2월 8일 재일유학생들에 의해 실현된 2·8 독립선언을 들수 있다. 동경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의 이 선언에서 유학생들은 '한국독립의 대의' 를 밝혀 한달이 채 못되어 3·1운동이 발발하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다음 1920년 4월 일본에서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세자인 영친왕의 결혼식을 기해 일제침략의 원흉들을 일거에 처단하려는 서상한(徐相漢)의사의 의거가 있었고, 1921년 2월 양근환의사의 친일파 민원식 응징 의거, 1923년 박 열의사의 일왕 폭살의거, 1924년 2월 의열단원 김지섭의사의 이중교(二重橋) 폭탄 투척의거가 있었다.


그리고 1923년 1월 8일에는 한인애국단의 단원 이봉창(李奉昌) 의사가 일본 왕궁의 앵전문 (櫻田門)앞에서 신년관병식을 끝내고 돌아오던 일왕 유인(裕仁)을 향해 폭탄을 투척한 의거가 있었다. 한편 1907년 6월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특사로 파견된 이 준·이상설·이위종 등이 일제의 압박으로 고통받는 한국의 실정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눈부신 활동이 있었다. 일제의 방해로 비록 본의회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특사들은 다방면으로 활동하여 한국의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준특사가 7월 14일 그곳에서 순국하는 아픔을 맞았다.


다음 대만에서는 1928년 5월 14일 조명하의사가 육군 특별검열사로 파견된 일본왕족이자 육군대장인 구이궁방언(九邇宮邦彦)을 단도로 격살하는 의거가 있었다.


이와같이 조국독립을 향한 의지를 곳곳에서 불태우던 한국 독립운동자들은 침략의 소굴인 일본은 물론 네델란드·대만지역에까지 침투하여 그들의 뜻을 펼쳤다.












1919년 3·1운동 직전 재일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한 조선기독교청년 회관 터.

동경의 전수대학 뒤편 서신전(西神田)3-6.


















2·8 독립선언을 한 조선기독교청년회관.

1923년 관동대지진때 소실되었다.




수년전 건립된 현재의 YMCA건물입구에

세워진 2·8독립선언기념비.
















1924년 2월 5일 일왕을 폭발시키기 위해 김지섭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일본궁성 앞의 이중교.














1923년 박 열 의사가 동지들과 함께 폭발시키려 했던 일왕이 기거한 일본 궁성.












의거에 앞서 한인애국단 단원으로 선서한 이봉창 의사.













이봉창 의사의 의거 현장인 일왕궁의 앵전문 앞.

















▲ 1907년 7월 9일 이위종이 만국평화회의를 취재하는 각국 기자들에게 '한국의 호소'를 연설한 국제협회 건물.


이준·이상설·이위종 등 3특사가 묵었던 헤이그 바겐스트리트 124번지 건물. 이곳에서 이 준열사가 1907년 7월 14일 순국하였다.













조명하 의사가 일왕의 장인이자 일본군 육군대장인 구이궁방언을 단도로 처단하였던.
대만 대중역 앞의 도서관 터.


미주지역의 독립운동

미주지역에서의 한국독립운동은 1908년 3월 23일 새프란시스코 페리부두앞 페리빌딩에서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 두 의사가 일제침략의 앞잡이인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총살 응징하면서 명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그 배경은 이보다 앞서 1903년부터 1905년까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 이민한 약 7,200여명의 한인들에 의해 민족운동의 근본을 다지게 되었다. 이들은 하와이 이주 후 하와이 뿐만 아니라 미주 본토까지 진출하여 갖은 고초를 이겨내며 1903년에서부터 1910년까지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하였고, 그 힘을 바탕으로 조국광복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가게 되었다. 이 국민회의 산하로는 북미·하와이·멕시코·시베리아·만주 지방총회 등을 조직하여 모름지기 국외 한인사회를 망라하는 민족독립운동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1913년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李承晩)은 이주 한인의 자제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할 한인중앙학원을 세우고, 1918년에는 이를 발전시켜 한인기독학원을 설립하였다.


또한 안창호(安昌浩)는 1913년 5월 흥사단(興士團)을 창립, 독립운동을 주도할 인재양성을 실시하여 그 힘을 바탕으로 조국독립운동을 떠맡게 하였다. 그런가 하면 미주 이민사회에서 이승만과 함께 양대 지도자였던 박용만(朴容萬)은 1914년 하와이 아후이마누농장에 조선국민군단을 편성하고 그 부설로 '산너머 병학교'라고도 부르던 사관학교를 개교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이와 같이 형성된 미주한인사회의 독립운동단체들은 그들의 힘을 끊임없이 결집시켜 미주내에서의 외교적 활동은 물론이고, 중국관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나 만주지역의 독립군단들에 연결 독립운동 인재를 파견하거나 독립군자금을 송부하여 조국광복운동의 중요면을 담당하였다.




대한제국시절의 주미 공사관.











대한제국시절의 주미공사관이었던 워싱턴 버머넌트 에버뉴 13가와 교차되는
'로건로타리 15번지의 현존하는 건물.














장인환. 전명운 두 의사가 스티븐스(Durham W,Stevens)를

총살 응징한 장소인 샌프란시스코의 페리 부두 빌딩.













일제의 한국침략 앞잡이인 친일미국인 스티븐스를

1908년 3월 23일 총살 응징한 장인환. 전명운 두 의사













로스앤젤레스 제퍼슨 거리에 있는 대한인국민회 중앙회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관이 있었던 호놀룰루시 밀러 스트리트 1303번지.













1913년 5월 안창호를 중심으로 조직된 흥사단이 1932년부터 1970년까지 사용 하였던 중앙회관.

로스엔젤레스 남카타리나 스트리트 3421번지.













로스엔젤레스의 도산 안창호 광장. 제퍼슨 거리 1938번지 일대.












1919년 8월 이승만이 조직하여 주도하였던 구미위원부

터인 뉴욕 노스웨스트 H스트리트 1314번지.














1914년 6월 박용만의 주도로 조직된 조선국민군단의

사관학교가 있었던 하와이 오하후 섬의 아후이마누 마을.














1919년 7월 미주지역의 독립운동기구로서 이승만이

주도하여 건립한 호놀룰루의 대한인 동지회 회관.

러시아지역의 독립운동

러시아 연해주지역은 1910년 국치 전후로부터 서·북간도와 함께 중요 독립군기지로 개척된 지역이다. 이 지역은 일찍이 1910년대 초반부터 국내의 수 많은 의병과 민족운동가가 망명하여 한인의 이주와 개척을 촉진시키는 한편, 십삼도의군(13道義軍)·성명회(聲明會) 등의 항일결사를 조직하였다. 또한 1914년에는 권업회의 주관하에 대한광복군 정부가 건립되어 독립군을 양성 무장투쟁을 주도하려 하였다.


망명 민족운동가들에 의해 이와 같이 개척된 연해주의 독립군기지에서 양성된 많은 독립군들은 한·러의 국경인 두만강을 넘어 국내 진입 유격전을 펼쳤다. 그리고 러시아지역 독립군기지는 만주지역 독립군들의 또 다른 기지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1년 6월 자유시(自由市, 알렉세예프스키)에서 발생한 자유시사변은 공산주의 주도자들의 당권과 군권을 둘러싼 알력항쟁이 빚은 독립군 사상 가장 비극적인 일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지역의 독립군들은 이후 이 모든 것을 극복하며 러시아혁명의 주최들과 협력, 그들의 힘을 축척시켜가며 항일전을 펴는 한편 많은 독립군 장령들이 시베리아를 빠져나와 남북만주에서 새로운 독립군 항전을 지속하였다.


러시아 연해주에 잔류 활동하던 독립군들은 1937년 소련정부에 의해 강제 실시된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이주정책이 있기전까지 무장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하여 조국광복의 일부분을 담당하는 해외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 강제 이주된 한인들은 소련정부의 갖은 박해 속에서도 러시아지역 이주 한인에게 붙여진 고려인으로서의 민족적 자부심을 고양하며 줄기차게 해외 한인사를 이어갔다.




중앙아시아 크즐오르다시에 있는 항일명장 홍범도의 묘와 동상.











1920년 3월 1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거행된 3·1운동 1주년기념 항일 시위.













연해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수 많은 의병과 독립군들이 국내진입 작전을 펼쳤던 두만강.













국외 항일의병의 본영인 연추창의소(煙秋倡義所)가 있었던 크라스키노(煙秋)전경.
















1910년 6월 연해주·북간도 일대의 통합 항일의병세력으로 형성된
'십삼도의군이 조직된 재피거우.

















1911년 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여 수많은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집결활동하였던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新韓村).














연해주 최초의 한인 고등교육기관이었던 고려사범학교의 옛 건물.
'블라디보스톡 대양대통로에 현존해 있다.













1921년 5월 고려 공산당 창당대회가 개최되었던 이르크추크 레닌거리 23번지의 건물.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참변이었던 자유시사변(1921년 6월)이 일어났던 자유시(알렉세예프스키).













1911년 10월 조직된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총회 본부가 있었던 치타.


1920년대 후반 이후 독립군의 활동

1920년대 중후반 남만주지역을 무대로 무장활동을 주도했던 참의부· 정의부와 북만주의 주력군단인 신민부 등은 192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일제가 만주침략을 적극화하여 독립군 및 배일 한국인 탄압에 전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여 효율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각 군단의 통합을 절실히 느꼈다.


따라서 3부는 1928년 중순부터 수 차례에 걸쳐 독립운동 세력통합을 위한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남만주에는 1929년 새로운 독립운동 통합체인 조선혁명군이 설립되었고, 북만주에는 1930년 한국독립군이 조직되었다. 이같이 조직된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은 이후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하여 1930년대 중반까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들 두 독립군단 외에 1930년대 이후부터 만주지역에는 한인사회주의자들이 중국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하여 조직한 동북인민혁명군과 그를 이은 동북인민항일연군의 활동이 있었다. 그리고 1940년대 초에는 한국 사회주의자들만의 항일 군단인 조선의용군이 조직되어 광복의 그날까지 줄기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후반 이후 노령과 만주지역 독립군들의 중심 활동지역이었던 북만의 영안역.











1920년대 후반 이후 북만지역 독립군들의 중심활동 거점이었던 산시(山市)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상징한 표시가 새겨진 석마돌.













한국총연합회에서 경영하던 정미소의 석마판과 석마돌.












조선혁명군의 많은 대원을 배출한 강전자무관학교 소재지였던 통화현 강전자향 동강촌.














조선혁명군이 세운 민족학교인 신빈현 왕청문 소재의 화흥중학 .

현재는 조선중학으로 변하여 이주 한인의 후예들이 교육을 받고 있다.












조선혁명군. 동북인민혁명군 대원들이 만주를 침입한

일본군들과 수 많은 전투를 벌였던 신빈현성(新賓縣成 ,당시에는興京縣成).













1933년 5월 조선혁명군이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신빈빈현 영릉가(永陵街).













조선혁명군의 전투지인 신빈현 영릉가 앞산인 연두산(延頭山).

조선혁명군 대원들은 낮에는 이 산에 숨어 있다가 야간에는

산에서 나와 군사작전을 수행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 조선혁명군 및 동북 인민혁명군

대원들이 일본군들과 전투를 벌였던 지역인 신빈현 향수하자.














1930년대 초반 조선혁명군이 근거지이자 일제와의 전투지였던 환인현 감천구령(坎川溝嶺 ).














조선혁명군 대원 김윤걸이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한 신빈현 향수하자의 뒷산인 요보산(腰堡山).












조선혁명군 통신대원이었던 김도선(金道善)의 신빈현 흑구촌(黑溝村)집 터.

김도선은 일본군들이 양세봉(梁世奉)장군을 피살한후, 죽은 양세봉의 목을

자르라하는 지시를 따르지 않아 일본군에게 총살 당한 인물이다.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이 일본군의 속임수에 넘어가 피살되어 순국한 신빈현 소황구천 밭옆의 길












1913년 12월 조선혁명군 간부들이 회의도중 일본군의 습격을

당한 장소인 신빈진 민주가 제8대(民主家 第8隊)의 서세명가(徐世名家).
















신빈현성 뒷산에 세워진 동북인민혁명군

지휘관이었던 이홍관의 동상.




중국 및 한국의 항일열사들을 기념하여

세운비. 신빈현성 뒷산에 위치.

3부(府) 관할도

참의부·정의부·신민부 등 3부는 각기 남북 만주내 한인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관할지역을 정하여 한인을 보호하고 자치기능을 담당하는 군정부로서의 역할을 시행함과 함께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즉 신민부는 북만주의 영안현을 비롯 주하·목릉·밀산·요하·돈하현 등을 관할구역으로 구축하였다. 또 3부중 가장 활발한 무장투쟁을 전개한 참의부는 압록강변의 집안·관전·임강·장백·무송현 등을 관할구역으로 하였으며, 통의부의 활동을 계승하여 조직된 정의부는 하얼빈 이남의 전 남만지역을 관할지역으로 하였다.




















1922년 봄 독립군의 통합을 위한 회의인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가

개최되었던 환인현 마권자(桓仁縣 馬圈子)(현 지명은 향양).














통의부 보위대.정의부 제5중대 및 1920년대 후반 이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국민부 및 조선 혁명군의 본부가 있었던 신빈현 왕청문(旺淸門).














신빈현 왕청문 마을로 들어 가는 입구의 표시석.












통의부·의군부·정의부 등이 독립군사령부 기지로 활용하였던 신빈현 대황구.













대황구 독립군 사령부의 초소. 사령부에서 약 1km떨어진 계곡 입구이다.













독립군들이 무술을 연마하였던 대황구의 연병장과 병영터.












집안현 화전자(花甸子) 마을. 참의부 본부 소재지인 화전자에는 관할 한인의 건강을

보살피기 위해 참의부에서 직접 경영한 화전자 병원과 동화(東華)병원이 있었다.














3부(府)중 가장 활발한 무장활동을 전개한 참의부 본부가 소재하였던 집안현 화전자.












집안현 랍자구의 마을 표시석













참의부 제2중대 통신기관이 있었던 집안현 랍자구.





1925년 3월 16일 참의부 제 2중대가 일제의 초산경찰대와 전투를 벌였던 집안현 고마령(古馬嶺).

일제 경찰대의 기습공격을 당한 이 전투에서 참의부 대원들은 완강히 접전을 벌였으나 막대한 희생을 내었다.












참의부 및 정의부 대원들이 일본군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던 집안현 양수천자(凉水泉子).













참의부 1중대 본부 근거지인 집안현 유수림자(楡樹林子).













정의부 제 7중대의 본부 소재지인 유하현 이도구.












정의부가 통신연락사무소가 있었던 관전현 모전자(毛甸子).지금은 양잠농가로 변하였다.

















관전현 모전자 전경.
















청산리대첩후 북만(北滿)으로 이동한 독립군들이 노령으로 이동하기전 모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던 밀산의 당벽진. 이곳은 북로군정서 총재 서 일(徐 一)이

자유시참변후 독립군들간의 충돌을 개탄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이기도 하다.













1927년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재만한인들을 상대로 안창호가

연설하였던 길림시 대동공장(大東工場) 터. 지금은 공지로 남아있다.












통의부 2중대 3소대 본부 소재지이자 참의부

김명봉(金鳴鳳)부대가 전투를 벌였던 관전현 삼도구














정의부의 거점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孫貞道)

목사가 교회를 운영했던 길림시 우마항 서광호동(牛馬巷 曙光胡洞)11-1호.














참의부 무장부대 전투지중의 한 지역인 집안현 대양차.

통의부 및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활동

청산리대첩과 경신참변(庚申慘變) 이후 남북 만주로 근거지를 이동하여 새로운 결의를 다지며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독립군단들은 남북 만주에 산재해 있는 여러 독립군단들을 결집하는 통합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남만주에서는 1922년 8월 환인현의 마권자(馬圈子)에 독립군단 대표들이 모여 남만한족통일회의를 개최하여 통합 독립군단인 대한통의부를 결성하였다. 또한 같은 시기 북만주에서는 북만지역 독립군 통합체인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와 같이 결성된 통합군단의 구성원들간에는 독립운동에 대한 이념과 사상을 합일하고, 결집시키기에는 아직까지 완전치 못하여, 1924년 초 통의부의 일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를 결성하여 분리되고, 나머지 세력은 정의부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북만주에서는 대한독립군단의 중심세력이 더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을 포괄하여 신민부를 결성하였다. 이같이 성립된 3부는 각기 그들의 주 근거지를 중심으로 관할 지역을 확정하여 경신참변후 강화된 만주내 일제의 독립군 탄압을 막아내며 한인의 자치를 담당하는 군정부(軍政府)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여 1920년대 중·후반 한국독립군의 무장투쟁을 주도해갔다.














참의부의 무장부대.


청산리대첩

삼둔자, 봉오동전투 등을 비롯한 1920년을 전후한 독립군의 국내 진입작전과 간도내에서의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은 일제의 1920년 10월 약 20,000명의 일본군 대병력을 간도로 침입시켰다. 이들 일본군의 임무는 간도내의 한국독립군을 전멸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군 대병력의 침입을 사전에 간파한 독립군들은 일시적인 피전책을 책정하여 이미 일본군 첩자들에 의해 간파된 근거지를 버리고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이동하였다. 독립군들은 백두산록 서쪽의 울창한 산림지대를 그들의 새로운 근거지로 하여 병력을 이동 중 10월 20일경 청산리라 불리는 화룡현의 2·3도구에 약 10여개의 독립군단이 집결하게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일본군은 이 지역으로 약 5,000명의 병력을 투입시켜 독립군과의 6·7일간에 걸친 대소 10여회의 전투가 전개되었다.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어랑촌(漁郞村) 등 청산리 계곡일대의 골짜기에서 전개된 이 대첩에서 김좌진·홍범도·안무 등 유능한 지휘관들의 작전 지시에 따른 독립군들은 신명을 다해 싸운결과 대승리를 이루었다.



















청산리대첩시 독립군이 사용하였던 무기. 이무기는 대첩후 독립군들이

남북만으로 이동하면서 일시적으로 감추어 놓은 것을 일본군이 찾아낸 것이다.















청산리대첩의 격전장인 백운평.
















청산리대첩의 격전장인 남완루구.













청산리대첩의 격전장인 북완루구.





















청산리대첩의 격전장인 천수평.





청산리대첩의 격전장인 어랑촌.













청산리대첩의 격전장인 맹개골.





















청산리대첩의 격전장인 만기구.





청산리대첩의 격전장인 쉬구.

















청산리대첩의 격전장인 천보산.







청산리대첩의 격전장인 고동하곡.


















청산리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전적비.




청산리대첩의 격전장인 야저구.



봉오동전투

1920년 6월초, 30명 가량으로 구성된 독립군 소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온성 북쪽지역으로 국내진입전을 단행하여 일제의 헌병순찰소대를 격파하였다. 이에 일제는 일본군 제19사단 소속의 남양(南陽)수비대로 독립군을 추격케 하였다. 하지만 이 추격군도 간도의 삼둔자(三屯子)에서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에게 재차 격퇴당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한국독립군에게 크게 패퇴당한 일제는 제19사단 소속의 일본군 수백명으로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다시 간도로 침입하여 왔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미리 감지한 홍범도· 안무·최진동 등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군들을 온성 대안 간도 땅인 봉오동(鳳梧洞) 골짜기로 유인하였다.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봉오동 지형은 독립군들이 일본군을 유인하여 습격전을 벌이기에는 최적지였다. 따라서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군을 골짜기 깊숙히 유인 일시에 총격을 퍼부어 대승리를 거두었다. 봉오동전투 결과 일본측은 전사자 160여명, 부상자 300여명 이었으며, 독립군측의 피해는 전사 4명, 부상 2명뿐이었다.
























봉오동 전투에 대한<<독립신문>>의 보도기사.

















1920년 6월 4일 삼둔자 전투가 전개되었던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月新江 三屯子).
















봉오동 전투시 일본군 주력부대인 안천(安川)부대가 봉오동을 향해 넘어 왔던 길.













독립군들이 유인된 일본군들을 향해 최초의 공격을 가했던 봉오동 상촌(上村).













봉오동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도문시(圖們市)에 세워진 봉오동전첩비.


독립군의 근거지 및 무장활동

< 독립군의 근거지 및 무장활동 >


1910년 전후 서·북간도 지역으로 망명하여 독립기지를 구축한 민족운동가들은 각지에서 모금된 군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고, 국내외 청장년을 모집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리고 이같은 바탕에서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조직된 많은 독립군단은 한·중 국경인 압록·두만강을 넘어 국내 진입 유격작전을 전개하였다. 즉 독립군들은 1개 전투단위를 수십명의 유격부대로 구성하여 일제의 경찰서나 군부대·주재소·면사무소 등을 습격, 큰 성과를 올렸다. 또한 만주지역에서는 독립군단의 근거지로 침입한 일본군들을 봉오동(鳳梧洞)이나 청산리(靑山里) 등에서 크게 물리쳐 대승첩을 이룩하였다. 이와 같이 서·북간도를 중심으로 근거지를 구축한 독립군단들은 무력을 갖춘 후 조국을 침략한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실행하였다.











수많은 독립군들이 넘나들며 국내진입 유격전을 전개하였던 압록강.







< 독립군의 무기구입로 >


간도지역의 독립군단들의 무기구입은 대개 노령의 연해주지역에서 이루어졌는데, 구입된 무기의 반입경로는 다음과 같이 3가지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① 노령의 니콜리스크를 경유하거나 스파스카야 또는 유정구를 거치는 경로로 포구라니치나야 부근에서 국경을 넘어 둔전영통로 또는 삼치구와 대오사구를 거쳐 왕청현의 오지인 나자구 지방으로 나오는 방법인데 이경우는 우수리강을 끼고 들어오게 된다.


② 블라디보스톡 또는 니콜리스크 및 추풍지구에서 왕청현 오지로 들어오는 경로로 동녕현에서 중·소 국경을 넘어 대오사구, 나자구 등을 경유하여 훈춘현의 대황구 또는 춘명향 서대파 방면으로 들어오는 방법이다.


③ 남부 연해주지방에서 훈춘현 국경지방으로 무기를 반입하는 경로로 홍기하 상류 삼림지대를 지나 바라바시 방면에서 국경을 넘어 훈춘현의 산간지대로 들어오는 방법이다.
























대한독립단 지단 및 부민단의 제2구 근거지, 신흥학우단의 본부,

통의부 4중대 1소대 본부 등 많은 독립군의 근거지가 설치되었던 유하현 대화사(大花斜)













1919년 4월 조직되어 서북간도 및 국내에 지단을 설치, 활발한 유격전을 펼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두번째 근거지이자 전투지인 집안현 패왕조(輯安縣 覇王槽)













김좌진(金佐鎭)이 이끈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사관연성소 터가 있었던

왕청현 십리평(汪淸縣 十里坪).














1920년 9월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의 졸업식 광경.













서간도지역을 주 무대로 하여 활동한 광복군총영이

1920년대 초반 일시 근거지를 두었던 관전현 태평초(太平哨)
















▲ 광복군총영·대한독립단 등 남만지역에 근거지를 둔 많은 독립군당이

국내진입전의 전진기지로 삼았던 압록강변의 관전현 하로하.(下路河)

▶ 관전현 하로하의 마을 표시석.














용연(龍淵)김정규(金鼎奎)일기. 애국지사 김정규가 직접 참여, 또는 주변에서 발생한 국내외 의병

및 독립군의 활동 등을 1907년 2월 16일부터 1921년 10월 17일까지 약 15년 동안 기록한 일기.














강우건(姜宇鍵)강상진(姜相震)의 수기, 장백현을 근거지로 활동한

대한독립군비단의 간부인 강우건과 강상진이 서간도 지역 독립군 활동을 기록한 수기.













대한독립단 3중대 근거지인 유하현 전삼도구(前三道溝)














안중근 의거

안중근의사의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의거는 일본제국주의의 한국과 동양제국 침략마수를 응징한 것으로 한국근대사는 물론 동양근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한국에 이어 만주까지 침략할 야욕을 가지고 러시아와의 협상을 위해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등박문을 안중근의사는 4발의 총알을 발사하여 처단하였다. 의거후 의연히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체포된 안의사는 중국 여순에 있는 일제의 감옥에 수감되어 갖은 고초를 당하였다. 그러나 옥중에서도 의사는 세계평화를 위한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당당히 밝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였다. 그리고 1910년 3월 26일 일제에 의해 순국함으로써 의사 안중근은 서른 두해의 생애를 조국의 제단에 바쳤다.














안중근 의거 당시의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와 동지들이 의거에 사용한 권총.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伊藤博文) 저격 처단 현장인 하얼빈 역 홈.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한국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처단한 하얼빈역 전경.












여순형무소의 현판.













의거후 일제에 의해 피체된 안의사가 수감되었던 여순형무소.


독립군기지 개척(북간도 지역)











일제하 한민족이 만주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을 상징하여 세워진 일송정.

연길현 용정시(延吉縣 龍井市)소재.













북간도 지역은 독립운동기지로 가장 먼저 개척된 지역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체결로 국망을 예견한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 등 민족운동가들은 1906년부터 북간도의 중심지인 연길현 용정촌(延吉縣龍井村)을 독립군기지의 한 예정지로 잡고 그 경영에 착수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1907년 용정촌에 민족주의 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였다. 서전서숙에서는 근대교육과 더불어 철두철미한 항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서전서숙에 이어 북간도에는 1908년 화룡면 명동촌에 항일교육의 도장으로 김약연(金躍淵) 등이 명동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민족교육기관의 설립·실시와 더불어 북간도지역에는 자치기관으로 간민자치회(墾民自治會)·간민교육회·간민회등이 조직되어 명실상부한 독립운동기지로 그 체제를 구축하였고, 독립전쟁을 실현할 수 있는 한인세력을 근간으로 발전하였다.















1906년 이상설(李相卨)이 민족교육기관으로 용정에 건립한 서전서숙터와 기념비.

현재는 그 곳에 용정소학교가 설립되어 있다.









▲1908년 김약연(金躍淵)등이 민족교육기관으로

설립한 명동학교의 유적지 기념비.











1906년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건립되었을 때의 서전서숙.













3.13 만세 시위를 기념하여 세워진 반일의사 비.













국내의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용정에서 3.13 만세 시위를 전개하다

순국한 열사들을 기념하여 조성한 3.13 반일 의사능. 용정시 교외 소재.



독립군기지 개척(서간도 지역)



1910년을 전후하여 망명한 민족운동가들이 독립군기지로 개척하였던 서간도 유하현(柳河縣)전경.


서간도 독립군 개척을 주도한 단체는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가들의 조직인 신민회(新民會)였다. 1909년 국외 독립운동기지 설립을 계획한 신민회는 서간도지역을 그들의 목표지로 예정하여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를 중심으로 기지를 건설해 나갔다. 삼원보 지방은 인가가 드문 황량한 미개척지로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을 위한 새로운 기반을 세우기에는 최적의 지역이었다. 따라서 민족운동가들은 이 지역에 민단적 성격의 경학사(耕學社)·부민단(扶民團) 등의 자치기관과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敎)·백서농장(白西農場) 등을 설립하여 민족운동 중심지로 개발해 갔다. 그리고 이와 같은 활동에서 축적된 힘으로 조국독립을 위한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주도 면밀하게 추진하였다.














관전현 구대구(寬甸縣 口袋構)에 세워진 이진룡 의병장 부인 우(禹)씨의 의열비.













의병진영을 이끌고 만주로 이동하여 활동하였던 이진룡(李鎭龍)

의병장이 전투중 일본군에 피체되었던 관전현 구대구.













서간도 독립군기지 최초의 민단적 성격을 띤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가

조직되었던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鄒家街)전경.













경학사에 이어 1912년 서간도 두번째 자치기관으로 설립된 부민단이

소재하였던 통화현 합니하(通化縣 哈泥河).












많은독립군 인재를 양성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분교가 소재하였던

유하현 고산자(孤山子)(무관학교설립당시에는 통하현 소속이었음.)














신흥무관학교의 교직원과 졸업생으로 구성된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이 주임이 되어 1914년
조직한 독립군영 백서농장(白西農莊)터인 유하현 소배차. 당시는 통하현 소속으로 장주는 김동삼(金東三) 이었다.













1910년대 백삼규(白三奎)가 지휘하며 무력항쟁을 주도하였던

향약단(鄕約團) 소재지인 관전현 소아하(小雅河).













신민회원들을 중심으로 개척된 초기 독립군기지인 유하현 삼원포(三源浦).












신흥무관학교 분교 및 서간도 두번째 자치기관인

부민단(扶民團) 제3구 소재지인 유하현 전승향 대두자














전승향 대두자 마을 입구에 세워진 마을 표시석.












독립군기지로 개척된 이래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유하현 삼원포의 조선족 거리













1919년 11월 김원봉(金元鳳)을 단장으로 조직되어 수많은 국내진입

의열활동을 전개한 의열단(義烈團) 결성지인 길림시 광화로(光華路)57호 일대.












독립군기지로 개척된 이래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유하현 삼원포의 조선족 거리














1919년 11월 김원봉(金元鳳)을 단장으로 조직되어 수많은 국내진입

의열활동을 전개한 의열단(義烈團) 결성지인 길림시 광화로(光華路)57호 일대.


독립군의 무장투쟁

< 독립군 무장투쟁 >



국망을 목전에 둔 1910년을 전후하여 많은 민족운동가들은 이주 한인사회의 규모가 큰 압록·두만강 너머의 한국과 국경을 접한 서북간도를 포함한 남북만주의 시베리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들은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기약하는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산업을 진흥 시키면서 서북간도에 독립군기지를 만들어 군사교육을 실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이와 같이하여 1919년 3·1운동을 전후한 시기 만주지역에는 약 50여개의 무장독립군단이 조직되었다. 이들 독립군단들은 압록·두만강을 너머 국내로 진입 유격전을 펼쳤다. 주 공격대상은 침략자 일제의 주재소·도청과 같은 침략기관과 그를 운영하며 한국인들을 괴롭히는 침략의 원흉들이었다.


독립군들의 이같은 국내진입 항일전은 한국을 영구 식민지화 하려는 일제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따라서 일제는 이같은 독립군들을 소멸시키기 위해 다각적인 작전계획을 세워 독립군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독립군들은 이들 일제의 무력부대를 또 다시 1920년 6월에는 간도 왕청현(王淸縣)의 봉오동에서, 그리고 같은해 10월에는 화룡현(和龍縣)의 청산리에서 물리쳐 독립전쟁 사상 빛나는 양대 승첩을 기록하였다.


이같은 신명을 바친 만주 독립군들의 무장투쟁은 1920년대 중반에는 참의부·정의부·신민부 등 3부의 활동으로 이어졌고, 20년대 후반과 30년대 전반기에는 북만주에서의 한국독립군과 남만주에서의 조선혁명군의 활동, 그리고 이후 부터는 조선의용대 및 동북항일의연군 등의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어 조국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 만주 및 노령의 중요 독립군단 >


1. 만주




























































































독립군단명


결 성

연 도



활 동

중심지



중심인물


활동사항


태극단 (太極團)


1919


장백현

(長白縣)

단장:조인관(趙人官)·정삼승(鄭森承)·김동준(金東俊) 단원은 2~3천명으로 국내진입전을 주로 하였음.

의군부 (義軍府)


1919


연길현

(延吉縣)

단장:이범윤(李範允)·진학신(秦學新)·최우익(崔又翼)·김청봉(金淸鳳)·김현규(金鉉圭) 한말의병(韓末義兵)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 일제식민지 통치기관 파괴에 주력.

의민단 (義民團)


1919


왕청현

(汪淸縣)

단장:방우룡(方雨龍)·김종헌(金種憲)·허 근(許 根)·홍 림(洪 林) 천주교도가 중심이 되어 조직. 국내 진입전에 주력.

대한정의군 정사

(大韓政義軍政司)


1919


안도현

(安圖縣)

총재:이 규(李 圭)·강 희(姜 憙)·홍정찬(洪禎贊)·장남섭(長南燮)·조동식(趙東植) 3·1운동직후 한말의병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대한정의단임시군정부(大韓正義團臨時軍政府)가 10월에 개편되어 조직된 단체.

조선국민의회

(朝鮮國民 議會)


1919


연길현

회장:김영학(金永學) 무장투쟁과 더불어 조선독립신문을 간행하여 민족독립사상 고취에 주력.

급진단 (急進團)


1919


훈춘현




노령의 독립군단과 연결되어 무장투쟁을 벌임.

한교공회

(韓僑公會)


1919


환인현

(桓仁縣)

손극장(孫克章)·독고욱(獨孤旭)·이천민(李天民) 일제침략기관 파괴와 친일파 척결에 크게 활약.

대한독립단

(大韓獨立團)


1919


유하현

(柳河縣)

총재:박장호(朴長浩)·조맹선(調盟善)·백삼규(白三奎) 만주 및 국내에 여러개의 지단을 두고 국내진입 유격전을 벌여 일제의 주재소등을 파괴함. 한말의병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

대한청년단

연합회 (大韓

靑年團聯合會)


1919


안동현

(安東縣)

총재:안병찬(安秉瓚)·김승만(金承萬)·김시점(金時漸) 국내외에 산재해있는 청년단을 연합하여 통일기구로 발족시킨 조직. 상해 임시정부의 명령에 절대복종하고, 기관지로 『대한청년보』를 발간.

대한독립 군비단

(大韓獨立軍備團)


1919


장백현

단장:이은항(李殷鄕)·이태걸(李泰杰) 압록강을 넘어 국내 진입전을 주로 함. 여러곳에 지단을 설치함.

서로군정서

(西路軍政署)


1919





독판:이상용(李相龍)·여 준(呂 準)·김동삼(金東三)·지청천(池靑天) 임시정부 군정부로서의 역할을 담당.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양성에 주력


































































































독립군단명


결 성

연 도



활 동

중심지



중심인물


활동사항


북로군정서

(北路軍政署)


1919


왕청현

총재:서 일(徐 一)·김좌진(金左鎭)·계 화(桂 和) 중광단(重光團.1919) -정의단(正義團.1919) -군정회(軍政會.1919)-북로군정서(1919년말)로 명칭을 개편하면서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와 함께 임시정부 산하군사기관으로서 전투에 참여. 청산리전투 등에 참가.

대한독립군

(大韓獨立軍)


1919


연길현

사령관:홍범도(洪範圖)·주 달(朱 達)·박경철(朴景喆) 의병장출신 홍범도의 지휘하에 봉오동전투 및 국내 진입 유격전을 적극적으로 벌임.

군무도독부

(軍務都督府)


1919


왕청현

사령관:최진동(崔振東;명록)·박 영(朴 英)·이춘승(李春承) 국내 진입전에 주력. 대한독립군·국민회군 등과 함께 봉오동 전투에 참가하여 큰 전과를 올림.

국민회군

(國民會軍)


1919


연길현

사령관:안 무(安 武) 간도 대한국민회의 소속부대로서 봉오동 전투 등에 참가.

흥업단

(興業團)


1919


무송현

(撫松縣)

단장:김 호(金 虎)·김 혁(金 赫)·윤세복 (尹世復) 각지에 지단을 설치 병농겸행(兵農兼行)의 시책을 취함.

광복단

(光復團)


1920


안도현

김성극(金星極)·홍두식(洪斗植)

각지에 여러개의 지단을 설치. 국내 유격전을 벌임.

광한단

(光韓團)


1920


관전현

(寬甸縣)

이시열(李時悅)·현익철(玄益哲)·현정경(玄正卿) 국내에 모험결사대(冒險決死隊)를 두어 국내 진입 유격전을 벌임.

의성단

(義成團)


1920


회덕현

(懷德縣)

단장:편강렬(片康烈)·양기탁(梁起鐸) 남북만의 일제침략기관 파괴와 친일파숙청.

야 단

(野 團)


1920


북만중동선(北滿中東線)

단장:신 포(申 砲) 청림교도(靑林敎徒)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

혈성단

(血誠團)


1920


오운현

(烏雲縣)

단장:김국초(金國礎) 김춘일(金春日) 애국청년혈성단(愛國靑年血誠團)이라고도 하며, 일제의 기관들을 파괴하는데 주력.

신대한청년회

(新大韓靑年會)


1920


훈춘현


회장:이경호(李京鎬) 훈춘에 있는 한인 청년으로 조직.

대한청년단

(大韓靑年團)


1920


연길현

단장:서성권(徐成權)·강백규(姜伯奎)













































































































































독립군단명


결 성

연 도



활 동

중심지



중심인물


활동사항


복황단

(復皇團)


1920



훈춘현



공교회원(孔敎會員)이 단원이었고, 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 임정에 송부.

창의단

(倡義團)






북간도

(北間島)

이범모(李範模) 북간도와 무산지방에서 활동.

청년맹호단

(靑年猛虎團)






북간도

단장:김상호(金尙鎬) 명동(明東) 및 정동(正東)학교 교직원과 학생들로 조직.

외정회부

(外政會部)






훈춘현






학생광복단

(學生光復團)






왕정현

김 승(金 昇)


보합단

(普合團)


1920


평북 의주군 및 관전현

김중양(金仲亮)·박초식(朴初植)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정에 송금.

보황단

(普皇團)






북간도






충열대

(忠烈隊)






연길현






건국회

(建國會)






훈춘현

황병길(黃丙吉)·박치환(朴致換)


자위단

(自衛團)






연길현

단장:최경호(崔經浩) 국자가(局子街)에 있는 중국도립중학교 한인학생과 졸업생으로 조직.

대진단

(大辰團)


1920




안동현

단장:김중건(金中建) 군총으로 무장된 청년단원 약200여명으로 구성.

향약단

(鄕約團)






관전현

단장:백삼규(白三奎)

무력을 통한 조선조(朝鮮朝)의 복벽을 주장, 후에 대한 독립단에 통합됨.

의용단

(義勇團)


1920


관전현



국내 및 중국각지에 지단을 설치하고 활동.

무장단

(武裝團)


1920


관전현






청년단

(靑年團)


1920


관전현






농무회

(農務會)


1920


임강현

(臨江縣)

김종범(金宗範) 독립군단체와 연락을 취하여 통합작전을 벌임.

한교민단

(韓僑民團)


1920


관전현






광복군총영

(光復軍總營)


1920


관전현

총영장:오동진(吳東振)·조병준(趙秉準) 임정산하의 전투군단으로서 이 단체의 국내 지단인 천마산대(天摩山隊)는 국내에서 일제의 주재소 등을 파괴하는 등 활약함.























































































































독립군단명


결 성

연 도



활 동

중심지



중심인물


활동사항


대한신민회

(大韓新民會)


1920



훈춘현

회장:김규면(金奎冕)

기독교 성리교인이 중심이 되어 조직, 블라디보스톡에 지단을 두었음. 청산리전투에도 참가.

백산무사단

(白山武士團)


1921


임강현

단장:이두성(李斗星)·김보환(金寶煥)


대한통군부

(大韓統軍府)


1922


환인현

총장:채상덕(蔡相悳)·김동삼(金東三)·이천민(李天民) 대한독립단의 일부와 광한단·한교회 등의 단체가 통합하여 조직된 단체.

대한통의부

(大韓統義府)


1922


환인현

총장:김동삼(金東三)·채상덕(蔡相悳)·이웅해(李雄海)·양규열(梁圭烈)

대한통군부를 확대 개편하여 남만주의 새통일 독립운동 기관으로 결성.

광정단

(匡正團)


1922


무송현

단장:김호익(金虎翼)·윤덕보(尹德甫)·강진건(姜鎭乾) 대한독립군비단·흥업단·태극단·광복단의 4단체가 통합하여 조직.

고려혁명군

(高麗革命軍)


1923


연길현

단장:임병극(林炳極)




참의부

(參議府)


1923


집안현

(輯安縣)



백광운(白狂雲)·최석순(崔碩淳)·김승학(金承學)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으로서 압록강 연변의 동포사회에 기반을 두고 집안현을 중심으로 무송(撫松)·장백(長白)·안도(安圖)·통화(通化)·유하(柳河) 등지의 동포사회를 관할하며 국내 진입에 주력.

정의부

(正義府)


1924


남만

(南滿)

김동삼(金東三)·현정경(玄正卿)·지청천(池靑天)

참의부가 군사단체의 성격인데 반해, 정의부는 동포사회의 자치단체 성격으로 출발하여 산업·교육·치안·행정 등에 보다 많은 힘을 경주.

신민부

(新民府)


1925


북만

(北滿)

김 혁(金赫)·김좌진(金佐鎭)·조성환(曺成煥) 삼권분립체제에 의하여 북만주 일대의 동포사회를 관할, 또한 목릉현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

혁신의회

(革新議會)


1928


길림

(吉林)

의장:김동삼(金東三)·황학수(黃學秀)·지청천(池靑天) 3부(참의부·정의부·신민부)통합을 위해 각 단체가 노력하였으나 결렬되자 정식 군정부 건립을 위한 과도기적 정부.

국민부

(國民府)


1929


길림

현익철(玄益哲)·최동오(崔東旿) 참의부·정의부·신민부의 일부 인사가 통합을 결의하여 조직한 단체.

조선혁명군

(朝鮮革命軍)


1929


남만

양세봉(梁世奉)·이웅(李雄) 흑길별동대(黑吉別動隊)를 조직하여 적극적 군사활동개시. 또한 중국군과 합작하여 수많은 전투를 치룸.

한국독립군

(韓國獨立軍)


1930


북만

지청천(池靑天)·신 숙(申 肅)·오광선(吳光鮮) 중국군과 연합군단을 편성하여 일제와 대항.

신한농민당

(新韓農民堂)


1930


북만

김광희(金光熙)


대한혁명당

(大韓革命堂)


1932


동녕현

(東寧縣)

강국모(姜國模)



2. 노령
































































독립군단명


결 성

연 도



활 동

중심지



중심인물


활동사항




전국청년연합회

(全國靑年聯合會)


1919



소왕영

(蘇王營)




유영락(柳永樂)·오익표(吳翼杓)





노인단

(老人團)


1919


해삼위

(海蔘威)


단장:김치보(金致甫)

강우규의사의 남대문역 앞 재등실(齎藤實) 조선총독 저격.


소년애국단

(少年愛國團)






해삼위


정창선(鄭昌善)




부인회

(婦人會)






해삼위


회장:이의순(李義舜)





원호회

(原戶會)


1919


노령

(露嶺) 각지


회장:니그나치




한인사회단

(韓人社會團)


1920


해삼위


회장:장도정(張道定)







대한독립군결사대(大韓獨立軍決死隊)


1920


시시지미







국내 진입전을 통해 일제의 기관을 파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연표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 >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성립된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제의 패망때까지(1919~ 1945)조국광복을 위해 매진했던 한민족(韓民族)의 정신적 지주이자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이었다. 비록 나라를 잃고 외국에 망명하여 세운 임시정부였지만, 그 지도자들은 조국광복을 위해 신명을 다바쳐 임시정부를 수호 발전시켰다.


임시정부는 입헌민주주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하여 임시헌장(임시헌법)을 제정하고 내무·외무·재무·교통·군법·법무 등의 부서를 둔 국무원과 임시의정원을 두어 입법 기능을 수행할 민의를 반영하고, 국내외 민족운동을 총괄 주로 조국의 해방과 독립쟁취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1923년 세력팽창을 도모한 일본 제국주의의 원흉들을 폭살 응징한 한인애국단 단원인 윤봉길의사의 의거 이후 중국 상해를 떠나 항주·진강·장사·광주·유주·기강을 거쳐 1940년 중경에 정착하였다.


이와같은 와중에도 임시정부는 조국독립을 위해 노력을 계속하여 1940년 9월 중경에서 임시정부의 국군으로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한국광복군은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일제와 무력대결을 전개한 영미 등 연합국과 긴밀한 공전체제를 유지하면서 인도·버마(현 미얀마) 등지에서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국내수복계획을 세워 광복이되는 그날까지 투쟁하였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표 >


































































































































1919. 3. 1. 3·1운동이 일어남
1919. 3. 17.

노령(露領) 연해주와 간도(間島)방면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임시정부 형태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를 조직.


1919. 4. 13.


중국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내외에 정식 선포.


1919. 4. 23.


서울에서 세칭 한성(漢城)임시정부 수립을 선포.
1919. 5. 10.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국가주권을 승인해줄 것을 요구하는 공고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고 아울러 각국 정부에도 발송.
1919. 7. 10.

임시정부, 국내와의 연락을 긴밀히 하기위한 연통제 실시공포, 실천에 옮김.
1919. 8. 21.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상해에서 발행.(창간 당시에는「독립」이란 명칭사용)


1919. 9. 11.


한성·상해·노령의 세곳에서 세워졌던 임시정부가 상해의 임시정부로 통합
1920. 2.

임시정부의 군사조직으로, 대한독립단·한족회·청년단연합회 등의 만주 독립국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광복군을 편성.
1920. 8. 5.

임시정부, 독립문제에 관한 진정서를 내한하는 미국의원에 제출하고자 양기탁(梁起鐸)등 5명을 파견.


1921. 8. 26.


임시정부,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太平洋會議 外交後援會)조직.
1921. 10.

임시정부, 광동중화호법정부(廣東中華護法政府)와 외교관계 수립을 위해 신규식(申圭植)을 특파.
1922. 10.

군인 양성·전비조달을 목적으로 하는 임시정부 외곽단체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조직.
1923. 1. 3.

국내외 독립운동의 단결을 위해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상해에 모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 동회의는 동년 6월에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으로 결렬.


1925. 3. .18.


임시의정원,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의결.


1926. 12.14.


임시정부 국무령에 김구 취임.
1927. 2. 15.

임시헌약을 통과시켜 종래에 수반제에서 집단 지도체제로 정부 조직을 개편.


1931. 12. 28.


임시정부 국무령 김구의 직속하에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조직.
1932. 1. 8.

한인애국단 이봉창(李奉昌)의사가 일본 동경에서 일왕(日王)을 저격하는 의거를 일으킴.
1932. 4. 29.

한인 애국단원 윤봉길(尹奉吉)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된 일왕생일 축하식장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 킴.


1932. 5. ~1940. 9


윤봉길 의거후 임시정부, 상해를 떠나 항주(杭州)·가흥(嘉興)·유주(柳州)·기강 등을 거처 중경(重慶)에 정착.
1932. 11.15.

임시정부 국무령 김구와 장개석(長介石)사이에 이루어진 합의에 따라 중국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韓人特別班)설치.


1940. 9.


중경(重慶)에서 광복군(光復軍)이 창설됨.


1940. 11.


한국광복군의 총사령부가 중경에서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으로 이전.
1941. 11. 25.

임시정부가 대한민국건국강령을 발표, 정치이념과 독립전쟁 준비태세에 천명.


1941. 12. 9.


임시정부가 대일(對日) 선전포고(宣戰布告).


1942. 5.


김원봉(金元鳳)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광복군의 제 1지대로 편입됨


1943. 8. 13


연합사령부의 요청에 따라 광복군 1개 대(隊)를 버마 전선에 파견.


1944. 6.


프랑스와 폴란드 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을 통고.


1945. 8. 15.


광복.


1945. 11.


임시정부일행이 중영을 출발하여 환국.



해외의 한민족 조국 독립운동

광복50주년을 기념하여 독립기념관은 일제하 한민족이 해외 여러지역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의 중요자료와 사진 등을 전시한다.


개항이래 끊임없는 외세에 시달려 오던 조선은 1910년 8월 일본 제국주의자의 침략을 받아 국권을 상실하였다. 이때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증국·러시아·일본·하와이와 미주본토 등에 망명, 신명을 바쳐 다양한 방법으로 조국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중국의 동북지역 및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와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중국의 상해로 망명한 민족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웠다. 미주지역에서는 대한인국민회·흥사단 등이 조직되어 이주한 동포들의 마음을 한고리로 엮어 광복사업을 실천해 갔다. 한편, 안중근(安重根)·윤봉길(尹奉吉)·이봉창(李奉昌) 등 의열사들은 사생취의의 의열투쟁을 전개하여 중국의 하얼빈·상해·일본의 동경으로 돌진하여 침략 원흉들을 폭살 응징 하였다.


이와 같이 한민족은 침략자 일제를 향해 세계곳곳에서 조국광복을 쟁취 하기위해 매진하였다. 본 특별기획전에서는 이들 애국지사들의 활동을 중국지역의 독립운동, 러시아 지역의 독립운동,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 일본 및 네델란드·대만 지역의 독립운동 등으로 나누어 그 유적지 및 공적을 살펴 봄으로서 일제하 한민족이 전개한 줄기찬 독립운동사를 재조명 하고자한 것이다.

인사말

년은 우리민족이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난지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따라서 독립기념관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많은 행사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해외의 한민족독립운동" 전도 그 행사중의 하나로"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전에 이어 두번째로 기획된 특별 기획전입니다.


우리민족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받은 이래 조국광복을 위해 국내외에서 부단한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와 그시절을 보내신 분들의 증언으로 알 수 있듯이 일제의 식민지 한국통치는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자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상대한 우리선열들의 조국광복을 위한 투쟁 또한 적극적이고 강인한 것이었습니다. 국내에서 침략자 일제의 원흉들과 함께 생활하며 투쟁한 선열들의 활동도 피어린 것이었지만, 해외로 망명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한 애국지사들의 활동 또한 오늘날의 우리가 필설로는 형용키 어려운 고초속에서 이루어진 값진 것이었습니다. 즉, 1910년을 전후해 한국을 완전히 병탄코자한 일제에 의해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이 어려움을 깨달은 많은 민족운동가들은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낯선 이국에 자리잡은 이들은 자국의 국민도 엄두내지 못한 박토를 개간하여 산업을 일으키고 이주 한인들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시켜 독립군을 양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성된 독립군을 근간으로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모은 군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여 독립전쟁을 치룰 독립군단을 조직하였습니다.


이들 독립군들은 국내로 진입하여 유격전을 전개하고, 간도에서 봉오동·청산리대첩 등을 치루며 일제와 무력전을 전개하였습니다. 또 중국의 상해에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국내외 독립운동을 총체적으로 주도해 갔습니다. 임시정부는 수립된 이래 온갖 역경이 있었지만, 단 한번도 해체되지 않고 광복이 된 그날까지 우리민족을 이끈 명실상부한 정부였습니다.


다음 미주지역으로 망명한 애국 선열들 또한 한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일면을 차지하는 활동을 하신 분들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이주한 한인들을 대상으로 대한인국민회나 흥사단과 같은 애국단체들을 구성하고, 그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할 인제들을 양성하는 한편 한인들이 피땀흘려 벌은 돈을 군자금으로 모집하여 임시정부나 만주의 독립군단들에 보내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토록 하였습니다. 또한 이들 지역외에 침략의 소굴인 일본을 비롯하여 네델란드·대만 등 세계 각지에서 한민족은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투쟁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우리가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금번 광복 50주년을 기해 이제야 그분들의 피흘린 현장을 찾아 국민 여러분들께 소개하게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독립기념관은 이번의 행사를 1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이후 꾸준히 해외 또는 국내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활동하신 분들의 위업을 발굴하고자 발자취를 살펴 소개해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1995년8월15일


독립기념관 관장 최창규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 이택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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