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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여운형(呂運亨 1886~1947), 김규식(金奎植 1881~1950)
작성일 : 2021-03-05 조회수 : 1,517 pat104_4.jpg

여운형,김규식 시 어록비

조선의 도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우리가 건설하려는 국가는 인민이 주인이 되어 인민을 다스리는 국가일 것이다. 이미 민주공화국은 대한민족의 절대적 요구요 세계 대세의 요구다. 제군은 비록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고 가지만 등에는 한반도를 짊어지고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전 세계의 동정만 가지고는 독립을 얻을 줄로 생각지 맙시다. 우리의 독립은 우리의 손으로만이 되옵니다. 우리의 독립은 우리의 맘으로만이 되옵니다. 우리의 독립은 우리가 단결하여 싸우되 마지막 핏방울이 떨어질�x까지 싸워야 되옵니니다.

몽양(夢陽) 여운형 선생은 1885년 4월 경기도 양평(楊平)에서 출생하여 배재학당, 흥화학교 등에서 신학문을 익혔으며, 1908년에는 기호학회 평의원으로 활동하였고, 1910년 강릉의 초당의숙에서 민족교육에 매진하였다. 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였으며,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크게 부각시키기 위해 장덕수를 일본에 파견하여 2·8독립선언을 촉발케 하였다.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부 차장,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11월에는 일본의 심장부인 동경을 방문하여 일본 고위 관료들을 상대로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여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920년 조국의 독립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써 공산당의 원조를 기대하여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10월에는 상해로 돌아와 독립운동의 장기적 구도아래 백범 김구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여 군사적 투쟁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독립운동계에서 임시정부의 재편문제가 부상하자, 안창호와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도하였고, 1923년 초부터 국민대표회의가 열릴 때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개조’를 주장하였다. 1933년에는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나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대회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사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었다.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1944년 8월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결성하여 조국광복을 준비하였고, 광복 후에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으나 실패하고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1947년 극우파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2008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우사(尤史) 김규식 선생은 1881년 1월 아버지 김지성(金智性)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897년 미국 유학을 떠나 로아노크 대학(Roanoke College)에서 수학하고,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은 후 1904년 귀국하였다. 1906년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여러 강연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했으며 1913년 11월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 신규식과 함께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고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되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 자격으로 5월 12일에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독립 항고서(抗告書)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고 「한국독립과 평화」라는 책자를 비롯해 다수의 독립운동 홍보문서를 작성하고 각국 대표들 및 언론인들에게 배포해 한국인의 독립의 열망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1921년 임시정부 내에 독립운동 노선으로 갈등이 야기되자, 잠시 임시정부를 떠났다가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에서 국민위원과 외무위원을 맡았다. 1933년 1월 미국을 방문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운동을 전개하고 수천달러를 모금해 돌아왔으며,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사천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힘썼다. 1942년 10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고 1944년 부주석에 취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을 대표하는 김구 주석과 민족혁명당을 대표하는 김규식 부주석 체제의 양대 정당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이 연대와 협력을 이루어가며 조국 광복을 이루어내었다. 선생은 1950년 북한군에 납치되어 그 해 12월 10일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 별오동에서 7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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