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독립운동가
송몽규·안창남·김필순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청년들의 독립운동
송몽규, 안창남, 김필순은 각각 인문학, 과학기술, 의학 분야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당대의 청년이었다. 송몽규는 연희전문학교, 교토제국대학에 입학하여 재일 한인유학생들의 독립의식고취를 위해 힘썼으며, 일본 유학을 통해 비행사로 활동하였던 안창남은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였다. 김필순은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청년들은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에서 자신들이 습득한 지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한 방법을 마련하는데 헌신하였지만 독립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청년들의 힘을 모아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송몽규
송몽규는 1917년 중국 룽징(龍井)에서 태어났다. 1935년 난징(南京)에서 김구가 설립한 학생훈련소에 입소하고자 고향을 떠났으며, 지난(濟南)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중 1936년 4월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 후 학생단체 문우회의 기관지 『문우』의 편집을 맡아 일제의 ‘조선어’ 사용 금지 정책에도 한글로 된 시(詩)를 실어 우리글을 지키고자 하였다. 1942년 교토(京都)제국대학 사학과에 선과생(選科生)으로 입학하였고, 재일한인 유학생과 교류하며 조국 독립 방안을 모색하였다. 일제는 ‘징병제를 독립 수단’으로 삼고자 했다는 이유로 붙잡아 1944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하였고 송몽규는 1945년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문우』 (1941)_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관 제공(좌), 교토제국대학 시절 송몽규(앞줄 가운데, 1942)(우)
비행을 통한 항일 무장투쟁에 나선 안창남
안창남은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21년 오구리(小栗)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비행사 면허를 취득하였으며 다음해 고국방문 비행에 성공하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한국인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 비행 기술을 독립운동에 활용하고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중국군과 협력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고 비행사 양성에 힘썼다. 1928년에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아 비행학교 등 무관학교를 설립하고자 했으나 1930년 4월 산시(山西)항공학교에서 비행 훈련 중 기체 고장으로 추락하여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일본 잡지에 실린 안창남 모습(좌), 「안창남군의 부산착발」『동아일보』 (1922.12.6.)(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앞장선 의사 김필순
김필순은 1878년 황해도 장연군에서 태어났다. 1908년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의술개업인허장(醫術開業認許狀)을 받은 후 세브란스의학교와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 활동하며 후진 양성에 앞장섰다.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를 지원하고 신민회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1911년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하여 독립운동을 탄압하자 중국 동북지역(만주) 퉁화현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썼다. 1916년 일제의 간섭을 피해 내몽골 치치하얼로 옮겨 진료소를 개설하고 의료 활동에 종사하고 독립운동기지에 애쓰던 그는 1919년 8월 갑작스럽게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세브란스병원의학교 1회 졸업식 사진 (1908)_연세대학교 동은의학박물관 제공(좌), 김필순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1912.3.11.)(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