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이병희, 항일투쟁의 역정
둘, 인력거꾼과 기생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글 김성은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이병희, 노동운동에서 독립운동까지
항일투쟁의 역정
이병희는 국내에서 일본의 차별에 맞서 ‘항일 파업투쟁의 선봉’으로서 노동 파업을 주도하다가 검거되어 옥살이를 했다. 중국으로 건너가서는 이육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되었고, 감옥에서 사망한 이육사의 시신을 손수 수습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다.
이병희
(동아일보 1938년 5월 24일자)
이병희 수형기록카드
가정환경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일찍 투신하다
이병희의 조부 이원식은 동창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을 이끈 민족운동 1세대다. 아버지 이경식은 1925년 9월 대구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암살단 단원으로 활동하였는데, 1927년 ‘장진홍 사건’으로 알려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거사’에 연루되어 중국으로 망명, 외몽고 지역에서 활동하는 등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노동운동가 이효정은 이병희의 조카다. 이병희가 고모였으나 나이는 이효정보다 5살 더 어렸다. 이밖에도 어머니는 독립운동을 하다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는 등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이병희는 집안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학교를 당장 그만두어라.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직접 일제와 싸워야 한다.” 백부 이원근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의 이 같은 권유로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현장에 투신하게 되었다.
항일노동운동의 선봉에 서다
1933년 16세에 다니던 경성여자상업학교를 그만둔 이병희는 서울에 있는 종연방적주식회사 여공으로 취업해 노동현장에서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이곳에서 여성노동자 600여 명을 이끌고 파업을 주도했다. 후에 그녀는 “일제가 운영하던 공장은 초등학교 정도의 교육을 받은 여성들만 직공으로 받았는데, 파업을 통한 여공들의 저항은 대단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다. 1936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때의 나이는 겨우 19세로, 항일노동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어 죽음보다 더한 고문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유적지에서 이병희를 비롯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고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5,000여 명의 애국지사들은 이곳에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특히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더 힘든 고문을 당했으니, 바로 성고문이었다. 이병희는 "차라리 죽여 달라”고 했을 정도로 가혹하고 참아내기 힘든 고통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병희는 조선공산당 재건 기초공작으로 인한 치안유지법 위반(朝鮮共産黨 再建設 京城準備그룹事件)이란 죄명으로 징역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1939년 4월 출소하였다. 이듬해인 1940년 아버지 이경식이 활동하던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北京)에서 10촌 할아버지뻘인 육사 이원록을 만나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또한 이육사는 의열단에 가입해 무장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병희는 여기서 베이징과 연안, 만주를 넘나들며 군자금을 모금하거나 전달하고 동지들 간의 연락·문서 전달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옥중에서 겪은 고통에도 항일독립운동에 매진한 ‘의지의 여성 독립투사’였던 것이다.
이육사의 시신을 거둔 이병희
이병희는 1943년 여름 다시 체포되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이경식을 쫓아다녔던 일본 순사는 그녀에게 “네가 자라 적이 되었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병희는 베이징감옥에 수감되었다. 한국인 간수를 통해 이육사도 수감된 사실을 알았다. 이육사는 1943년 7월 체포되어 베이징감옥에 수감돼 17차례에 걸친 투옥과 감방생활로 폐결핵에 걸려 생명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병희는 “개죽음을 당하기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동지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결혼을 조건으로 홀로 풀려났다가, 곧 육사가 옥사(1944년 1월 16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병희는 “선을 본 남자(조인찬, 남편)에게 결혼을 승낙하기로 한 날이었는데 육사의 유해를 수습하느라 이리저리 뛰다가 남편을 밤 10시까지 기다리게 했다.” “화장한 육사의 유해를 밥상 위에 올려놓고 결혼을 승낙했다”고 회고하였다. 결혼식 날에는 육사의 유해를 조국으로 보내는 절차를 밟느라 파혼의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나, 다행히 남편의 이해로 뒤늦게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이병희는 육사의 주검을 수습하고 그의 유고시집을 챙겨 1946년 『육사시집』 발간을 이끌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육사의 시집을 볼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노고 덕분이다.
광복 이후 1948년 귀국한 그녀는 생전에 “독립운동은 남성들의 역할도 컸지만 여성들이 기여한 부분도 적지 않으니 언젠가는 사람들이 여성들의 독립운동을 알아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2008년 KBS 휴먼다큐 <사미인곡>에서는 독립운동가 이병희의 삶을 조명한 바 있다. 그녀는 광복 51주년을 맞은 1996년 77세 되던 해에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으며, 2012년 95세로 생을 마감했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독립투사를 도와준 인력거꾼과 기생
일제강점기에 인력거꾼은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직업이었다. 승객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기 일쑤였고, 인력거 삯으로 받은 돈을 인력거 업주와 나눠야 했기 때문에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면치 못했다. 한국인 업주의 경우에는 번 돈을 5대 5로 나누어야 했기에 인력거꾼이 정작 손에 쥐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비싼 인력거를 도둑맞기라도 하는 날에는 인력거 값을 물어주느라 거리로 나앉기도 했다.
인력거꾼들이 직접 세운 학교
인력거꾼들은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자식들에게 자신의 천한 직업과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3천여 명의 인력거꾼이 모여 자녀들이 다닐 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1924년 경성차부협회를 만들었다. ‘우리 자녀는 우리가 가르치자’며 매월 50전씩 회비를 걷어 학교 건립 자금을 모으기로 한 것이다.
1925년 5월 1일 이들은 서울 수송동에 셋집을 얻어 드디어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가 바로 대동학원이다. 4개 학급 60여 명의 학생을 모아 보통학교 교육을 시작한 이곳은 점점 학생 수가 늘어났다. 그리하여 2년 뒤에는 봉익동의 일본인 집을 빌려 학교 건물로 사용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학교가 경영난에 빠지게 되면서 월세 45원을 내지 못해 문을 닫아야 할 형편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정이 알려지자, 평소 인력거를 가장 많이 이용하던 기생들이 발 벗고 나섰다. 서울의 한성 권번·조선 권번·대정 권번·한남 권번·대동 권번에 속한 기생 700여 명은 ‘학교 후원 연주회’를 다섯 차례나 열어, 그 수익금과 자신들이 번 돈 3,300여 원을 내놓았다. 이 돈으로 대동학원은 1927년 9월 광희문 밖 신당리의 건물을 사서 이사해 정상화될 수 있었다.
가깝게 지낸 인력거꾼과 기생
기생은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와 춤, 악기 연주로 흥을 돋우는 일을 하던 젊은 여성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관기’라고 하여 관청에 속해 있었다. 1909년 관기 제도가 폐지되자 기생조합이 생겨났다. 조합에 소속된 기생들은 요릿집에서 부르면 요릿집으로 직접 가서 손님을 접대하기 시작했다.
기생조합은 1914년 일본식인 ‘권번’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권번에서는 기생들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요릿집에 기생 명단인 ‘초일기’를 보내 손님들이 기생을 부를 수 있도록 해 요릿집 출입을 도왔다. 손님이 기생을 지명하면 요릿집 종업원은 권번에 전화를 걸어 그 기생을 불러 달라고 하고, 권번에서는 인력거를 기생집에 보내 기생을 요릿집으로 데려가게 했다. 예약도 가능했는데, 일류 명기를 부르려면 일주일 전에 예약해야 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기생들은 늘 인력거를 타고 다녔다. 그들은 등받이에 기대지 않은 채 꼿꼿이 앉아, 가야금 등을 발판에 세워 한 손으로 잡고 갔다. 기생들은 자신들을 과시하고 선전하기 위해 일부러 인력거 포장을 젖히고 다녔다. 반면 가정집 부인들은 기생으로 오인 받을까 봐 꼭 포장을 씌우고 다녔다.
인력거꾼들은 기생을 자주 태우고 다니면서 자연스레 그들의 수입이 좋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인력거꾼 가운데는 자기 딸을 권번으로 보내 기생으로 만든 사람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인력거꾼은 손님인 기생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고, 기생은 인력거꾼을 정중히 대하며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를 돕다
한번은 일류 요릿집 명월관을 드나들던 기생 현산옥이 자신의 집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잠입한 독립투사를 숨겨준 일이 있었다. 그녀는 명월관 인력거꾼을 시켜 독립투사가 다른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인력거꾼이 현산옥의 집에 와서 쪽지를 전하자 이를 목격한 일본인 형사가 뒤따라와 캐물었다. “웬 쪽지냐?” 인력거꾼과 기생은 미리 약속한 대로 이렇게 대답했다. “문 밖 놀이에 나오라는 기별 쪽지예요.” 그러나 일본인 형사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방 안에는 현산옥의 어머니가 이불을 덮은 채 누워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어머니가 깜짝 놀라 묻자 일본인 형사는 미안하다며 사과하고 돌아갔다. 그 때 독립투사는 재빨리 현산옥 어머니와 같은 이불 속에 누워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처럼 인력거꾼·기생 중에는 일제강점기에 독립투사를 도와준 사람이 적지 않았다.
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