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체절명의 한국사

나폴레옹 3세와의 전쟁
병인양요

나폴레옹 3세와의 전쟁 <BR />병인양요

글 김종성 역사작가


나폴레옹 3세와의 전쟁 

병인양요


19세기에 조선을 탐낸 나라는 일본·청나라·러시아뿐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각축을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본 영국·미국·프랑스도 한때는 군대를 보내 조선을 위협하였다. 그중 1866년에 프랑스가 일으킨 병인양요는 조선인들이 민관을 가리지 않고 강화·김포로 나가 총력 저항을 펼친 전쟁이었다.


프랑스의 식민지 확장 정책

병인양요 이전인 1846년과 1847년에도 프랑스 함대가 무력시위를 벌인 적이 있다. 천주교 박해에 대한 항의 차원의 시위였지만, 이때는 1866년만큼 공격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1866년에는 상대를 굴복시킨다는 명확한 목표로 조선을 침공하였다. 

1840년대와 1860년대에 프랑스의 태도가 달랐던 것은 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와 관련이 있다. 1789년 혁명으로 1792년에 공화정으로 바뀌었다가 1804년 나폴레옹 황제 즉위와 함께 제정으로 전환된 프랑스는 1815년 나폴레옹 몰락과 함께 왕정으로 완전히 복귀하였다. 하지만 1848년 2월,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면서 공화정이 재차 회복(제2공화정)되었다. 이때 대통령이 된 인물이 나폴레옹 3세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 3세가 적극 추진한 정책은 해외 식민지의 확장이었고, 그의 시선이 머문 곳 중 한 곳이 조선이었다. 1856년에는 인도차이나 사령부에 조선 식민지화에 필요한 정보 수집을 명령한 일도 있었다.  

프랑스가 조선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정세 변화도 큰 몫을 하였다. 1840년 제1차 아편전쟁 이래 수세적 입장에 놓인 청나라에서 민중의 반외세 투쟁인 태평천국운동(1851~1864)이 발생하여 중국 동남부 일부가 점령되었다. 1856년에 발발한 제2차 아편전쟁에서도 서양열강이 청나라를 제한적으로 굴복시키는 데 그친 것이 영향을 끼쳤다. 

두 사건의 영향으로 1860년대부터 서양열강은 중국을 직접 공략하기보다는 중국을 빙 둘러싼 티베트-미얀마-베트남-타이완(중국령)-오키나와-조선을 우선적으로 공략하였다. 빙 둘러싼 동맹국이나 변경이 청나라의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866년에 조선에서 병인양요와 더불어 미국에 의한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발생하고, 1871년에 미국에 의한 신미양요가 발생한 데는 이러한 정세 변화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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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성 전투(강화역사관)



병인양요 발발

조선에 대한 프랑스의 관심이 고조되는 상태에서 병인년에 벌어진 천주교 박해가 전쟁에 불을 붙이는 촉매제가 되었다. 병인박해로 불리는 이 사건은 역대 최대의 천주교 탄압 사건으로 비화되면서 프랑스 선교사와 조선인 신도들의 대거 희생을 초래하였다. 이때 탈출해 7월 7일(양력) 산둥성 즈푸에 도착한 리델 신부에 의해 사건 전모가 알려짐에 따라, 베이징 동쪽 텐진에 주둔 중이던 로즈 제독이 9월 18일 전함 3척을 이끌고 즈푸를 출발하게 되었다. 병인양요는 이렇게 발발하였다. 

그전인 7월 13일에 청나라 총리각국사무아문(외교부) 수석대신인 공친왕에게 보낸 “조선 국왕이 우리 프랑스인을 체포한 날은 그 치세의 종말을 고하는 날”이라며 “며칠 안에 우리 군대가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진군할 것”이라는 서한을 통해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간접적으로 전달한 프랑스 군대는 인천 앞바다와 양화진을 거쳐 한강에 침투하였다. 항행 중에 이들은 한편으로는 측량을 하고 한편으로는 위협을 가하였다. 조선은 전통적 관행에 따라 이양선에 음식물을 제공하였지만, 프랑스군은 지금의 서울 강서구에 있었던 염창항에서 공격을 가해 조선 수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에 맞서 조선의 방어 태세가 공고해지는 속에서 프랑스군은 9월 27일 서강(한강의 양화진-마포 구간)에서 뱃머리를 돌렸다. 10월 1일, 프랑스군은 영종도와 육지 사이의 작약도를 출발해 즈푸항으로 귀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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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헌수 초상화(강화역사관)



돌아온 프랑스군

불과 열흘 뒤인 10월 11일, 로즈 제독의 군대는 즈푸항을 재출발하였다. 제2차 침공에 동원된 병력은 제1차의 곱절을 넘었다. 군함은 7척으로 늘어났고, 병력도 1500명 수준이 되었다. 배가된 전력을 바탕으로 프랑스군은 10월 16일 강화도 점령에 성공하였다. 한양으로 통하는 수상 길목을 장악한 것이다. 그런 강화해협 동쪽의 통진부를 점령하면서 압박의 강도를 높여갔다.

화력이 우세한 프랑스군이 한양을 향해 목을 조여 오는 위기 상황에서 가슴 뭉클한 일이 벌어졌다. 일반 백성들이 정부의 요청에 호응하여 전투에 자원한 것이다. 각도 백성들이 의병·승군·포수군·보부상부대의 일원으로 전장에 뛰어들었다. 이로 인해 11월 1일까지 한강 양화나루 지역에 의병 4천 명이 배치될 수 있었다. 포수군 270여 명도 김포에 배치되었다. 승군들도 양주목사의 지휘 하에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 포진하였다. 보부상 부대를 비롯한 다수의 백성들도 한양 사수를 위해 나섰다. 

이렇게 긴장이 팽팽해지는 가운데, 로즈 제독은 조선 정부에 요구 조건을 제시하였다. 선교사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삼정승을 처벌하고, 불평등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자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선을 개방시키는 데 일차적 관심을 보였다. 프랑스가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상황에서 김포 쪽 문수산성에서 조선군이 뜻밖의 승리를 거뒀다. 이로 인해 조선 진영의 사기가 오르면서 양헌수가 이끄는 관군 부대가 인상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것이 전쟁의 전체 판도를 바꿔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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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유적지인 강화포수전첩기념비



호랑이굴에 잠입한 조선군

강화도가 프랑스군에 점령된 상황에서 양헌수 부대는 대담한 작전에 뛰어들었다. 호랑이굴에 잠입하기로 한 것이다. 양헌수는 강화도 남부 요새인 정족산성을 장악하면 적군을 손바닥 안에 넣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프랑스군 몰래 강화도로 들어가 정족산성을 점거하는 작전을 구상하였다. 약 500명의 병력을 3진으로 나눈 그는 강화해협 도하작전을 벌여 정족산성까지 무사히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첩보를 입수한 로즈 제독은 병력 150명을 파견해 산성 탈환을 시도하였다. 프랑스군은 남문과 동문을 공략하는 작전을 수립하였다. 그래서 그쪽으로 프랑스 병력이 집중되었다. 이 상황을 양헌수는 이미 계산에 넣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접근하기 전에 남문과 동문 쪽에 병력을 매복시켰던 것이다. 이런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양헌수 부대는 프랑스군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곳곳에 매복한 조선 포수들은 프랑스군의 접근을 숨죽이며 지켜봤다. 프랑스군이 사정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그러던 중 동문 쪽에서 총성이 울리고 프랑스군 1명이 쓰러졌다. 이를 신호탄으로 해서 동문과 남문의 조선군이 일제 사격을 가하였다. 예상치 못한 매복 공격에 부상자가 속출하자 프랑스군은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력상 열세에 놓인 조선군이 지형적 특성을 활용해 상대를 막아낸 결과였다. 이 전투는 프랑스군의 사기를 꺾는 데 기여하였다. 11월 18일 프랑스군은 완전히 철수하였다. 나폴레옹 3세의 군대가 조선에서 퇴각한 것이다.  병인양요로 불리는 이 사건은 의병·포수·승병·보부상들이 관군과 협력하여 프랑스군의 한양 진격을 막고 그들을 강화도에서 쫓아낸 전쟁이었다. 우리 땅을 우리 스스로 지킨다는 조선인들의 의지가 우수한 화력을 앞세운 유럽 강대국을 물리친 사건이었다.  

병인양요는 많은 상처를 남겼다. 프랑스군의 침략은 막아냈지만, 강화도는 대대적인 약탈의 상흔을 안게 되었다. 강화도에 보관 중이던 외규장각 도서들과 은궤 887.55kg 등을 프랑스군과 함께 떠나보내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