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개천절과 독립운동
그리고 현재적 의미

개천절과 독립운동 <BR />그리고 현재적 의미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개천절과 독립운동 

그리고 

현재적 의미





개천절이 국경일로 정해진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바로 다음 해인 1949년이다. 이때 3·1절, 제헌절, 광복절 등도 국가 법률로써 경축일로 정해졌다. 한글날은 2005년에 국경일로 승격되었다.

개천절의 기원

개천절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하늘이 열린 날, 즉 개국·건국을 기념하여 제정한 국경일을 뜻한다. 국경일에 대해 의미를 모르는 이는 드물겠지만, 개천절에 대해서는 단순히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날’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단군을 기리게 되었고, 지금 우리에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는가?

단군의 정신으로 민족 고유의 종교가 된 것은 1909년 1월 15일 나철이 단군 대황조 신위를 모시고 제천 의식을 올린 뒤 단군교를 선포하면서다. 나철은 러일전쟁 이후 일제가 침략 야욕을 드러내자 관직을 그만두고 오기호·이기 등과 비밀결사 유신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에 나섰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네노부 총리대신에게 조선 독립을 촉구하며 도쿄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 항쟁을 벌이는가 하면, 국내로 돌아와 을사5적을 처단하려다 붙잡혀 유형 10년을 받기도 하였다. 

나철은 날이 갈수록 일제의 침략 야욕이 거세지는 상황에 민족정신을 바로잡아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인구세(濟人救世)’를 위하여 단군정신에 주목하였다. 이에 단군교를 창시하였고 1910년 국망이 닥쳐오자 대종교로 이름을 바꿨다. 1910년 당시 교인 수는 21,539명에 달했다. 이때 나철은 1909년 음력 10월 3일에 치렀던 개극절(開極節) 행사를 개천절로 바꾸었다. 

우리나라 역사의 기원을 단군에서 출발하는 인식은 고려 후기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 시작되었다. 단군을 동국(東國)의 개국조로 여기는 역사 계승의식은 이때 형성되었다. 하지만 16세기에 사림세력이 등장하면서 단군보다는 기자 존숭이 강조되었다. 단군이 제일 먼저이지만 문헌으로 실증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다가 17세기 후반 중국 문명과 관련성을 탈피하려는 분위기 속에서 단군 인식에도 크게 변화하였다. 단군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역사서술이 등장한 것이다. 세도정치기에 주춤했던 단군 인식은 한말에 자주자강을 위한 국민계몽 차원에서 단군이 다시 부각되었다. 조선의 유구한 역사와 독립성이 강조되면서 단군을 개국조로, 기자를 단군의 계승자로 위치 지었다. 특히 1904년부터 단군과 민족의식이 결합하여 강력한 민족주의 의식으로 확장되었고, 점차 우리 민족을 ‘단군의 자손’이라면서 혈연적 운명공동체로서 국망의 현실에 대처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대종교가 탄생하였고 개천절 행사가 음력 10월 3일에 치러졌다. 


일제의 개천절 탄압

하지만 국망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일제는 단군 탄생을 ‘황당하고 기괴하여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폄하하고, 대종교를 유사종교로 규정하였으며 개천절 행사도 금지하였다. 우리의 개천절 행사는 민족적 정체성 확인과 자주독립 의지를 고취하는 동력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다. 더욱이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동원·수탈정책과 민족말살정책 등에 개천절 행사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와 관련한 언론 보도는 거의 사라졌다. 대신 일제는 자신들의 건국신화를 절대적인 역사적 사실로 둔갑시켜 『일본서기』를 근거로, 2월 11일을 기원절로 제정하여 개국기념일로 공식화하였다. 

이에 나철은 백두산 아래의 중국 허룽현(和龍縣) 청파호에 망명하여 포교를 계속하였고, 북간도 교민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개천절 행사를 치렀다. 이는 종교적 기념일을 넘어 범민족적인 행사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독립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개천절 행사는 한인들이 사는 곳 어디에서든지 열려 웅변대회를 개최한다든지 마을에서는 떡을 쳐서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음력 10월 3일(양력 11월 24일)에 첫 개천절 행사를 개최하였다. 당시에는 이를 건국기원절이라 하였지만 개천절로 인식하였다. 

다음 해부터 임시정부는 개천절을 3·1절과 함께 공식 국경일로 제정하여 북경로 예배당, 서장로 영파회관(寧坡會館), 삼일당(三一堂), 민국로 침례교회 등에서, 충칭으로 옮겨서는 중앙문화운동회관 등에서 행사를 개최하였다. 임시정부가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을 피해 떠돌아다녀야 했던 시절에도 선상에서 개천절 행사를 치렀다. 해방 후에는 1945년 11월 귀국 길에 충칭과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천절을 기념하였다. 행사 날에 안창호와 이동휘는 「송축사」와 「축사」를 통해 단군의 민족적 의미를 예찬하며 종교나 이념을 초월한 민족 단합의 의지를 되새겼다.

광복의 기쁨은 국내의 개천절 행사에도 나타났다. 국민당 위원장 안재홍은 단기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였고, 3,000만 명의 동포들에게 아무쪼록 힘써서 성조의 기업(基業)을 확수(確守)하여 불효자손이 되지 말자고 맹세하는가 하면, 국조 숭경(崇敬)의 사상을 고취하자며 단군전을 세우자는 분위기도 무르익었다. 이를 기회로 해방 후 처음으로 맞는 개천절 행사가 서울운동장에서 대대적으로 열렸다. 


개천절을 대하는 자세

1946년 미군정 아래, 개천절은 국경일로 지정되었지만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되어 가자 동족 공영의 목표 아래 이해(利害)의 대치(對峙)를 극복하고 남북통일의 자주 정권 수립에 매진할 것을 강조하고 나섰다. 1947년 개천절에는 국토가 양단되었고 주권은 미군정에 있으며 우리 민족의 근화(權化)인 임시정부가 여전히 정당한 국권의 계승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비통함을 토로하면서 자주독립 즉 완전 독립을 위하여 3,000만 명이 다 같이 새로운 투쟁을 하자는 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1948년 11월 한 민족이 두 개로 분단된 뒤 처음으로 맞이한 개천절은 휴무일로 정해졌지만, 지역별·기관별로 행사가 치러졌을 뿐 정부 차원에서 움직임은 없었다. 서울시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치러진 개천절 행사에 서울시장과 몇몇 장관들만 참석하였다. 어떤 메시지도 던져주지 못한 채 으레 기념식처럼 개천절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 뒤 1949년에는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하기가 어렵고 양·음력을 떠나 ‘10월 3일’이 소중하다며 아무 관련 없는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제정해버렸다. 당시 정부 차원의 개천절 행사가 강화도 참성단에서 개최되었지만 부통령·국회의장·국무총리의 대독 경축사만 있었다. 

그 뒤 1950년대에는 중앙청 광장에서 3부 합동으로, 1960년대에는 시민회관·국립극장 등에서 국무총리 대독의 대통령 경축사가 낭독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치러졌고, 1988년 이후부터는 국무총리 경축사로 자리매김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1984~1985년 두 해뿐이다. 개천절은 우리나라의 5대 국경일 가운데 하나이지만 단군을 국조(國祖)가 아닌 대종교의 종교행사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단군의 기념일을 개천절로 기린 것은 단군이 국가의 시조에서 민족의 시조로 의미가 확장되어 국망 이후에는 우리 민족은 다 같은 자손이기 때문에 뭉쳐야 한다는 논리로 작동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분단국가가 아닌 통일을 염원하는 자리가 되었다. 북한에서도 개천절을 기념하고 있으니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중요한 날임을 모두 기억하는 것이다. 남과 북이 이견 없이 함께 공유하고 경축하는 날인만큼 통일을 향한 양국 교류의 기폭제로 삼으면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