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사람
임시 정부를 이끈 큰 어른, 이동녕

글 임영대 역사작가
임시 정부를 이끈 큰 어른, 이동녕

이동녕 1869.10.06.~1940.03.13.
충청남도 천안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자강과 개화만이 이 나라가 살길이다
이동녕은 전형적인 양반 가문 출신으로, 그의 부친 이병옥은 지방관을 역임했다. 5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는데, 주변에서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1892년, 24세가 되던 해에는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선비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는 세계적인 제국주의 시대에 휘말려 급변하는 중이었다. 전통적인 출세의 계단이었던 과거제도는 폐지되고 개화사상이 들어왔다. 양반 중에는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세상이 망했다며 개탄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동녕은 달랐다.
이동녕은 부친과 함께 원산으로 가서 육영사업을 하며 신학문을 전파했고, 28세 때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개화와 민권을 추구하는 구국운동에 참여했다.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 활동에서도 앞에 나서서 투쟁했고, 그러다 투옥되는 고난도 겪었다. 7개월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출옥한 이동녕은 『제국신문』에 「민족자강의 방도」라는 사설을 실으며 언론인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본격적인 민족주의 사상을 세워나갔다.
자강을 급히 서두르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는 강대국에 침략당할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그것을 면하려면 먼저 세계의 발전에 발맞추어 개화를 힘써 실천해야 한다.
이동녕은 이상재, 전덕기 등과 함께 YMCA기독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침략이 심해지자 청년회를 결성하여 항일운동을 벌였고, 을사늑약 반대 시위를 벌이다가 다시 투옥되었다. 이로써 국내에서는 일제의 압제로 인해 활동에 한계가 왔음을 깨닫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을 해탈하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이동녕이 처음 만주로 나간 때는 1906년, 38세 때였다. 북간도 용정촌으로 이주한 그는 이상설 등의 동지와 함께 최초의 항일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서전서숙은 이상설이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된 이듬해 폐숙하였으나, 이동녕은 신민회, 청년학우회, 교육단, 대성학교, 오산학교 등의 설립에 관여하면서 교육자로서의 활동을 지속했다.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이 완전히 일본에게 넘어가자 더 이상 국내에서 민족교육을 할 수 없게 된 이동녕은 다시 만주로 가서 국권 회복을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그는 요녕성 삼원보로 이주하여 우리 민족의 자치기관인 경학사와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또 동포들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권업회를 조직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광복군정부도 수립하였다. 신문 발간을 통해 동포들에게 독립사상도 고취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만주와 러시아에서의 독립운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이동녕은 동포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때를 기다렸고, 마침내 1919년 2월 1일 대종교 조직을 중심으로 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 우리 민족 최초의 독립선언서였다.
국민본령(國民本領)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할 것이며,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 일절(一切) 사망(邪網)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독립선언서 발표를 계기로 중국, 러시아 등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가를 하나로 모아 통합적인 독립투쟁을 시작하니 이것이 바로 상하이 임시정부의 시작이었다. 이동녕은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국호, 헌법, 관제 제정을 주도하였으며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는 이승만 대신 국무총리에도 취임하였다. 이후로도 내무총장, 국무총리, 군무총장, 대통령 직권대행, 의정원 의장, 국무위원회 주석, 법무총장 등을 역임하며 임시정부 운영에 최선을 다했다. 임시정부의 내분도 훌륭히 수습하였다.
김구와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 이사장으로도 추대되었으며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후원하기도 했다. 일제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될 무렵 이동녕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충칭으로 탈출, 임시정부의 4번째 주석이 되었다. 이때 이동녕의 나이 71세. 그는 일흔의 나이에도 굴하지 않고 임시정부를 이끌었으나 이듬해 폐렴으로 눈을 감았다. 이동녕의 장례는 임시정부 최초의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해방 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여 이동녕의 공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