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숨은 역사

무르익은 가을과 말을 걸어오는 풍경
경상남도 거창군

무르익은 가을과 말을 걸어오는 풍경<BR />경상남도 거창군

글 · 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무르익은 가을과 말을 걸어오는 풍경
경상남도 거창군


조선 중기 석루(石樓) 이경전은 거창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푸른 산봉우리들 사방에 모였는데, 한 가닥 냇물이 동쪽으로 비스듬히 흐르도다.” 물씬 찾아온 가을의 기운이 넘실대는 곳, 거창으로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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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 동굴을 지나면 나타나는

곳거창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지만, 이번 여행은 전북 무주를 거쳐 간다. 숲과 계곡이 청정한 무주구천동에 들어서면 전라도와 경상도를 이어주는 나제통문이 기다린다. 나제통문은 암벽을 뚫은 석굴로 옛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이루던 곳이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드나들었다 하여 ‘통일문’으로도 불리며, 무주구천동 33경 가운데 제1경이다.

나제통문이 드리운 그늘을 지나자, 높푸른 하늘과 환한 가을 햇살이 반겨준다. 갈색으로 타들어가는 산천 풍경을 바라보며 달려가다 보니 거창 땅 북상면에 다다랐다. 덕유산 끝자락에 올라앉은 전통사찰 송계사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향적봉 산행길의 관문으로 울창한 숲과 영취봉에서 시작한 맑은 물이 사시사철 흘러내리니 가히 절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송계사 들머리인 숲옛마을엔 유서 깊은 볼거리도 많다. 갈계리 임씨고가·은진임씨 정려각·서간소루·갈계숲·갈천서당 등하나같이 사연이 곡진히 배어 있다.

송계사: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송계사길 321

숲옛마을: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송계로 738 / oldvil.go2vi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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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제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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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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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이 일어났던 덕유산 아랫마을

마을을 빠져나와 남덕유산을 향해 들어가면 거창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월성계곡이 나온다. 덕유산 삿갓골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러내리면서 자연스레 생긴 계곡으로, 인적이 뜸하고 사철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월성에서 황점으로 오르는 길 중간 지점에 있는 사선대는 월성계곡의 백미로 길손의 발길을 붙잡는다.

월성숲과 맑은 계곡이 있는 양지마을은 항일독립운동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1905년, 지금은 없어진 월성서당을 중심으로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북상면 출신 40여 명이 월성서당에 모여 항일의거를 결의하고, 조국과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의병들은 1906년 문태수 의병진과 합류해 싸우는 한편 덕유산 의병에게 군수 물자를 전하기도 했다. 무주 고창골과 구천동 전투에서 일본군에 큰 승리를 거뒀지만, 1908년 박화기·박수기·유춘일 등 핵심 세력이 전사하면서 세가 꺾였다. 월성숲 한쪽엔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의병들을 기리는 정자와 기념비가 서 있어 옛 항일정신 발자취를 되짚어 볼 수 있다.

남정네들의 의병운동에 자극을 받은 여인들은 나랏빚 청산에 나섰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삽시간에 전국을 강타하자, 웅양면 산포리 오세동에 거주하는 연안이씨 부인들, 이현규 모친 정씨·이현규 부인 송씨·이준성 모친 하씨·이준홍 모친 전씨·이준문 숙모 김씨 등 17명은 19원 80전이라는 거금을 모았다. 이름조차 없었던 아낙네도 사회적인 책무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거창의 독립만세운동은 월성 말고도 가조면·가북면·위천면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1919년 3월 20일 가조 출신인 김병직·어명준 등을 중심으로 부민 500여 명이 가조면 장기리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본헌병분견소를 습격했다. 이어서 거창 장날인 22일에는 주민 3천여 명이 모여 만학정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 행렬은 거창읍내를 지나 살피재에서 더욱 더 기세를 높였다. 일본 헌병들은 이를 막고자 총탄으로 위협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주민들이 체포돼 갖은 고문과 옥고를 치르다 순국하는 아픔을 겪었다. 가조면 소재지엔 이들 애국지사 11분의 영령을 모신 충의사와 거창 3·1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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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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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당시 연안이씨 부인들의 모금 관련 기사(<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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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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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3·1운동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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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구천동을 빼닮은 수승대

덕유산 정기가 뻗치는 위천면의 수승대는 언제 찾아도 좋은 명승이다. 무주구천동을 옮겨놓은 것 같은 빼어난 절경이 압권이다. 신라와 백제가 대립하던 삼국시대, 백제에서 신라로 가던 사신들을 배웅했던 곳으로, 처음에는 백제인들이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했다고 해서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고 했다가, 1543년 조선 중종 때 퇴계 이황이 이곳에 들렀다가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수승대(搜勝臺)로 이름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숲이 에워싸고 있는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거북처럼 생긴 거북바위(일명 암구대岩龜臺)가 나타난다. 남덕유산 월성계곡과 송계사 계곡에서 흘러내린 위천은 이곳 거북바위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거창읍내를 가로질러 황강과 합천호에 이른 후 낙동강에 몸을 섞는다. 거북바위 표면에는 이황의 글과 거창의 이름난 선비인 임훈의 시를 비롯해 수많은 글귀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아마도 십장생인 거북에 이름을 새기면 장수한다는 속설 때문이리라.

수승대: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1길 60-6 / 055-943-5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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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승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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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승대 거북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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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담길이 아름다운 황산마을

황산마을은 돌담길과 전통 고가, 600년 된 느티나무가 어우러진 거창신씨 집성촌이다. 예부터 인근에서 손꼽히는 대지주들이 살던 곳으로, 등록문화재로 등재된 고즈넉한 흙담길을 따라 마을을 둘러보면 눈과 마음이 맑아진다.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하고 아늑하다. 낙엽 흩날리는 돌담길을 따라 느릿느릿 걷노라면 텅 빈 마음에 편안함이 들어앉는다.

마을에 가지런히 자리 잡아 저마다 특색을 내세운 한옥 50여 채는 거의 대부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들로,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지방 반가의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앞으로는 맑은 시냇물이 흘러간다. 마을은 이 시내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갈리며, 시내 동쪽은 ‘동녘’이라 부르고 서쪽은 ‘큰땀’이라 부른다.

황산마을: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4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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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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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마을 흙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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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과 폭포가 있는 두 골짜기

금원산은 거창의 진산이다. 덕유산에서 갈라져 나온 높은 산맥으로 바위와 계곡·폭포·자연휴양림까지 두루 갖추고 있어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에게 제격이다. 휴양림 위쪽으로는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두 골짜기가 있어 이 산의 멋을 더해주는데, 바로 성인골의 유안청계곡과 지장암에서 유래한 지재미골이다. 이곳의 이름에는 재미있는 전설들이 담겨있다. 유안청은 옛날 선비들(儒)이 세속을 떠나 책상(案)을 들고 이 산에 찾아 들어와 공부를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하며, 금원산(金猿山)은 옛날 이 산에서 날뛰던 금빛 원숭이 한 마리를 한 도승이 잡아다 원암(猿岩)이라는 바위에 가두어 버린 데서 비롯했다고 전해진다.

거창읍에서 서북쪽으로 약 3㎞ 거리에 있는 건계정 계곡도 둘러볼 만하다. 건계정은 거창장씨 후손들이 세운 정자로 1970년에 중건된 것이다. 정자가 올라앉은 바위 구배석(龜背石)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이 힘차다. 정자 오른편 건흥산 정상에는 신라에 패망한 백제인들이 나라를 재건할 목적으로 쌓은 거열산성이 남아 있다. 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제법 가파르지만 일단 산성에 이르면 조망이 아주 좋아 힘든 것도 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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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청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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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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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배석 아래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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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상흔을 간직하다
거창은 우리 역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큰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바로 한국전쟁이 빚은 거창사건이다. 거창에서 산청 쪽으로 가다보면 신원면 소재지가 나오는데 이곳이 거창사건의 진원지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거창사건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9일에서 11일까지 이곳 신원면에서 어린아이를 비롯해 수백 명의 마을 주민들이 일부 국군의 무분별한 총탄에 억울하게 희생당했던 참극의 역사다. 현재 추모공원에 추모문·합동묘역·위령탑·위패봉안각이 마련돼 있다.
거창사건추모공원: 경남 거창군 신원면 신차로 2924 / www.geochang.go.kr/case/Index.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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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사건추모공원 내 합동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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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사건 위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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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한가운데 도달한 거창의 자연 속에는 오랜 전설과 역사가 얽혀 있다. 발길 닿는 곳마다 말을 걸어오는 거창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이 가을을 흠뻑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