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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열강 속에서 빛난 전시외교
작성자 : 홍보문화부 작성일 : 2013-08-15 조회수 : 6,939

웹툰으로 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20 열강 속에서 빛난 전시외교
이미지 하단에 자세한 내용이 있습니다.
  • 임시정부가 활발히 활동하기 위해서는 중국 당국의 협조와 양해를 구하는 일이 가장 시급했습니다.

    "임시정부를 도와달라!" "가만 있어봐. 우리도 국민혁명 와중이라 정신 없다구."
  • 1927년 국민정부 수립 이후에도 중국 국민당 정부는 지원에 소극적이었지요.

    "임시정부를 도와달라!" "가만 있어봐. 일본에 눈치가 보여서..."
  • 그러던 중국은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부터 연락통로를 개설해 임시정부를 지원했고, 중일전쟁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은 일본제국주의와 싸운다는 점에서 우리와 동지입니다. 윤봉길에 의거해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우리 중국 국민당은 김구주석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도록 합시다."
  • 물론 중국측과 외교적인 마찰을 겪는 일도 있었지요.

    "중국 측에서 우리 광복군의 활동을 저지하고 있습니다." "허가증을 내주지 않아 다른 곳으로 이동조차 할 수 없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아무래도 우리를 중국군사위원회 소속으로 두고 싶은 모양이군요."

    결국 임시정부가 한발 양보해 광복군이 중국군사위원회의 통제를 받는 데 합의하고 활동에 대한 여러 가지 지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당당히 대한민국 대표 자격으로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는 일, 즉 공식적 승인 문제였습니다. 이를 위해 임시정부는 중국과 미국을 상태로 다양한 외교 활동을 펼쳤지요.

    "우리를 대한민국의 정부로 인정해달라!" "인정해주고 싶지만 좀 기다려봐. 다른 나라 눈치도 봐야하거든."
이미지 하단에 자세한 내용이 있습니다.
  • 중국과의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한문와협회를 통한 민간외교입니다.

    중한문화협회가 있던 곳 사진 "1942년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이 창립을 제의한 중한문화협회는 중국과 한국의 각계 인사들이 모여 학술, 문화적 교류를 하는 민간단체 인데,"
  • 쑨원의 아들은 쑨커가 이사장을 맡고 중국 정부, 국민당 측 인사는 물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대표 저우언라이까지 찾여한 기구였습니다.

      • 쑨커
      • 저우언라이
      •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
      •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
      •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
      • 조선민족혁명단 주석 김규식
      • 조선민족해망동맹 김석숙
      • 무정부주의자연맹 유자명
    "중국과 한국의 주요인사들은 빠짐없이 모였군!"
  • 중한문화협회는 국제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생길 때마다 강연회와 좌담회를 통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거론하고 촉구하는 장이 되었습니다.

    "우리 협회에서는 기관지도 발간했지요." "중국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상징적인 존재랍니다."
  • 임시정부는 또한 미국에 대한 외교를 중요하게 생각해 대미외교 전담기구를 두고 여러가지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했고,

    임시정부 수립직후

    구미위원부
  • 1934년에는 미국과의 외교를 전담하기 위한 기구로 '주미외무행서'를 설치하고, 외무부장의 명을 받아 외교 활동을 펼치도록 했습니다.

    1934년

    주미외무행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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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경시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주십시오!" 주미외교위원부
  • 임시정부는 미국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기 위해 다각도로 외교 활동을 벌였지요.

    "김구 주석이 또 편지를 보냈군." "미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승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연합국의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이 빠른 시일 안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쳥합니다."
  •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입니다. 우리 임시정부를 승인해주시기 바랍..." "그만하시오! 다른 연합국들의 입장이 정리되기 전까지 우리도 뭐라 할 수 없소."
  • 사실 각 나라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생각이 달랐습니다.

    (미국) "해방이 된다 해도 한국인들 스스로 국가를 건설한 능력이 없을 거야. 이런 상황에서 자치 정부를 인정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중국) "글쎄... 난 상황 좀 보고..." (프랑스) "우리는 승인하겠소. 임시정부 화이팅!" (영국) "맞아. 한국의 독립을 지지한다면 인도도 우리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려 할 게 아냐?"
  • 이런 상황 속에서 독립 후 한국을 국제공동관리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임시정부에서는 즉각 성명서를 발표했지요.

    "한인 전체는 일본 폐망 즉시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며 다른 나라에 의한 그 어떤 지배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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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미, 영, 소의 국가 원수에게 반대하는 전문을 보내고 반대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43.5.10 재중자유한인대회 (충칭)

    "전후 한국은 완전히 독립되어야 하고, 어떠한 형식의 외래간섭도 반대한다!" "한국민족은 마땅히 자유민이 되어야한다!" "옳소! 동의합니다!"
  • 이러한 때,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 영, 중 수뇌들이 모여 '카이로회담'을 개최한다는 소식이 전했습니다. 임시정부는 장개석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미, 영, 중 3대 연합국은 한국 민중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롭게 되고 독립하게 될 것을 결의하였다."
  • 비록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라는 단서가 붙어있지만, '카이로 회담'에서 독립을 보장받게 된 것은 임시정부가 열강들을 상대로 전개한 외교활동의 성과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부럽군. 한국 임시정부가 열심히 외교활동을 한 결과야."

    네루와 같은 인도 독립운동 지도자는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이 보장된 것을 보고 한국을 크게 부러워하였습니다.

독립기념관 봄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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