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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독립운동가 죽봉 김태원 의병장
작성자 : 기획조정실 작성일 : 2003-08-27 조회수 : 2,930 김태원보도자료.hwp 김태원 의병장 동상.jpg
"9월의 독립운동가 죽봉 김태원 의병장 (1870. 9. 16 ∼ 1908. 4. 25) 독립기념관(관장 이문원)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신 죽봉(竹峰) 김태원(金泰元) 의병장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김태원 의병장은 1870년 9월 전남 나주의 갈마지라는 마을에서 부친 김노학(金魯學)과 모친 장수황씨(長水黃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본명은 준(準)과 태중(太仲)이며 호는 죽봉(竹峰)이고, 태원은 자(字)이다. 그는 학문보다는 세상사에 더욱 많은 관심이 있어 일찍부터 뜻 있는 인사들과 교류하며 사회변혁의 꿈을 도모하였다. 이에 따라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에도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학 농민군의 행태에 실망하여 귀향한 이후 고향의 잘못된 관행과 사회적 폐단을 바로 잡는데 노력하였다. 을사오조약의 늑결을 전후하여 김태원은 김돈(金燉) 등과 상의한 끝에 기삼연(奇參衍)이 이끄는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고창 문수사 전투에서 결정적인 수훈을 세운 김태원은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에 임명되어 고창읍성·법성포·장성·영광·함평·담양 등지를 차례로 공격하며 반일투쟁을 주도하였다. 특히 1908년 설날 아침의 담양 무동촌 전투에서는 강력하기로 이름난 일본군 광주수비대를 격파하였고, 또한 장성의 토천전투는 한말의병사에 길이 기록될 만한 쾌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동촌 전투에서 김태원은 일본군 광주수비대의 기습에 맞서 “그대들이 죽음을 두려워 하는가. 대장부 남아가 죽을지언정 불의에 굴하여서는 안 된다. 또 적이 사방에서 총을 쏘는데 어찌 도망할 길이 있겠는가”라고 의병들을 독려하면서, 일본군이 공격을 물리칠 대책을 강구하였다. 김태원은 포수 출신의 강길환과 조덕관 등의 의병들을 돌담의 좌우에 매복시켰다가 일시에 일본군에게 공격을 감행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전투에서 김태원 의병장은 정예의 일본군 수비대를 보기 좋게 격파하였다. 한편 호남창의회맹소의 기삼연 의병장이 순창에서 1908년 1월말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김태원은 기삼연 의병장의 탈출을 도모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일제는 기삼연 의병장을 불법적으로 총살시키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기삼연 의병장의 순국을 전후하여 김태원은 호남의소의 이름으로 독립하여 동생인 율과 각각 수 백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의병항쟁을 계속하였다. 특히 1908년 3월 26일의 토천전투에서는 일본군 수 십명을 처단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김태원 형제의 의병부대의 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되자 일본 군경은 특설제2순사대를 편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비대와 헌병을 총동원하여 김태원 의병진의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일제 군경과의 항전을 계속하던 김태원 의병장은 광주 소지방(현재의 송정읍)에서 체포된 동생 율이 구축계획을 수립하고 자신의 허리치료를 위해 광주 어등산에서 일시 유진하다가 1908년 4월 25일 일본 기병대 및 특설순사대의 공격을 받고 전투 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김태원 의병장의 공훈을 인정하여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자료와 사진을 9월 한달 동안 전시할 계획이다. 붙임 : 9월의 독립운동가 김태원 의병장 관련 사진자료 1부. ※인물사진은 김태원 의병장 동상으로 대체 기타 자세한 문의는 학예실 전시팀(041-560-0271)로 문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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