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맨위로 맨위로 버튼

특별전시

  • home
  • 전시
  • 특별전시
한중수교 20주년 기념 국제교류전 - 중국에서의 한인 항일무장투쟁
연도 : 2012 전시 날짜 : 08.10~09.30 전시 장소 :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특별전시실 작성자 : 홍보문화부 작성일 : 2013-08-14 조회수 : 1,063

소개.   특별기획전을 개최하며

1-1.크기변환_포스터2.jpg

[소개] 특별기획전을 개최하며


한국과 중국 양국간의 항일운동을 기억하며, 또한 국교수립 20주년과 대한민국의 독립기념관·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의 개관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한국과 중국 양국 국민의 항일투쟁이라는 주제로 국제교류전을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독립기념관에서는 <중국에서의 한인 항일무장투쟁>이라는 주제로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에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이로써 양국국민이 함께했던 항일투쟁을 더욱 잘 이해하고, 양국 간 우호를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o 제목 : 한중수교 20주년 및 양 기관 개관 25주년 기념 국제교류전「중국에서의 한인 항일무장투쟁」

o 기간 : 2012년 8월 10일(금) ~ 9월 30일(일)

o 장소 : 중국 베이징 완핑성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특별전시실

o 주최 : 독립기념관

o 후원 : 국가보훈처·주중대한민국대사관·주중한국문화원

메인포스터
< 메인 포스터 >

1부.   항일투쟁의 시작

1-2.강제병탄조약문.jpg

1-2.의병부대.jpg

1-2.3.1운동.jpg

[1부] 항일투쟁의 시작


대한제국은 자주적인 근대화를 위한 개혁운동이 좌절되어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애국지사들은 중국으로 이주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국내에서는 적국적인 3·1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켜 일제에 저항했다. 그 결과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 수립되어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탄 조약문

ㅇ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탄 조약문(1910년)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맞서 싸운 의병부대

ㅇ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맞서 싸운 의병부대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인파

ㅇ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인파

2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항일독립운동

1-3.의거직후.jpg

1-3.안춘생졸업증(04625).jpg

1-3.한국국민당.jpg

1-3.-초기-상해청사.jpg

[2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항일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민족 최초의 민주공화제정부로 우리 민족의 대표 기구로써 항일독립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30년대 일제의 중국침략으로 위기에 처하자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결성하고 이봉창의사의 도쿄의거,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를 결행했다. 이로써 한중 양민족간 공동항일투쟁의 기반이 마련되었고, 중국 군관학교를 졸업한 군사 인재를 바탕으로 1937년 군사위원회를 설치해 군사정책을 본격화했다.


1919년 세워진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br>

ㅇ 1919년 세워진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윤봉길 의사 상해의거 직후 모습

ㅇ 윤봉길 의사 상해의거 직후 모습 : 윤봉길 의사 의거로 중국 침략에 앞장선 일제 군부와 정계 주요 인물이 다치거나 숨졌다.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한인 안춘생安椿生(중국식 이름 왕형王衡)의 졸업증

ㅇ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한인 안춘생安椿生(중국식 이름 왕형王衡)의 졸업증

한국국민당에서 중국동지들에게 고하는 글

ㅇ 한국국민당에서 중국동지들에게 고하는 글(1938. 8. 29) : 국치일 28년이 되는 날에 항전의 승리를 확신하면서 일본에 당한 치욕을 씻고 중국과 함께 항일전쟁에 열의를 다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3부.   조선의용대, 태항산의 열사들

1-4.-조선의용대-성립-기념.jpg

1-4.운두저촌-조선의용대주둔.jpg

1-4.태항산묘.jpg

[3부] 조선의용대, 태항산의 열사들


한편 민족혁명당 주도로 결성된 조선민족전선연맹에서는 1938년 10월 중국무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항일선전활동을 수행했다.

조선의용대는 1941년 중국 화북지방으로 진출하여 화북지대로 개편하고 호가장전투와 태항산전투에 참여해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1942년 조선의용군으로 개칭 후 광복이 될 때까지 중국 팔로군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하며 한인의 대일항전의지를 분명히 했다.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사진

ㅇ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사진(1938. 10. 10)

중국 산서성 운두저촌 조선의용대 주둔지

ㅇ 중국 산서성 운두저촌 조선의용대 주둔지 : 조선의용대가 쓴 항일구호가 복원되어 있다.

태항산자락에 안장된 윤세주·진광화 열사의 묘역

ㅇ 태항산자락에 안장된 윤세주·진광화 열사의 묘역 : 윤세주·진광화 열사는 중국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운 태항산전투에서 전사했다.

4부.   한국광복군

1-5.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jpg

1-5.-한국광복군-성립-전례식.jpg

10-1.전승축하공함2.jpg

10-1.전승축하공함1.jpg

[4부] 한국광복군


1940년 중국 중경에 정착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정부의 협조를 바탕으로 9월 17일 정식군대인 한국광복군총사령부를 창설했다. 중국군관학교에서 양성한 군사간부와 독립군 출신 병사,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 등으로 구성 되었으며, 4개 지대로 편제되어 초모활동과 선전활동을 수행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즉각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하고 전시체제로 들어가 연합군과 공동군사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 사진

ㅇ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 사진(1940. 9. 17)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내빈들의 기념 서명

ㅇ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내빈들의 기념 서명 : 주은래 등 중국정부의 축하 사절도 방문해 기념 서명했다.

김구가 오철성에게 보낸 전승 축하 공함

김구가 오철성에게 보낸 전승 축하 공함

ㅇ 김구가 오철성에게 보낸 전승 축하 공함(1945. 10. 10) : 항전 승리에 대한 축하와 함께 중국의 협조로 이룩한 한국 광복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있다.

5부.   광복, 그리고 대한민국

1-6.총독부-앞-대한민국정부.jpg

1-6.충칭-연화지청사에서대한.jpg

[5부] 광복, 그리고 대한민국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긴 이후 목숨을 걸고 펼친 무장투쟁과 다양한 독립운동으로 한민족은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나라를 되찾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에서 펼쳐진 오랜 기간의 항일투쟁을 끝내고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와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조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찍은 기념사진

ㅇ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조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찍은 기념사진(1945. 11.)

대한민국정부수립 국민 축하식

ㅇ 대한민국정부수립 국민 축하식(1948. 8. 15)

에필로그.   전시를 마치며

1-7.최근-한중회담.jpg

1-7.한국미식의-밤.jpg

[에필로그] 전시를 마치며


광복 직후의 어지러운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수립된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하나로 성장했고, 이 과정에서 1992년 중국과 수교를 정식으로 맺어 정치·경제·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교류하고 있다. 과거 공동 무장투쟁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오랜 역사적 유대감과 지난 20년간 쌓아 온 상호 신뢰는 미래 한중 공동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될 것이다.

중국 건국 60주년 기념으로 주중한국대사관에서 개최한 ‘한국 미식의 밤’ 행사

ㅇ 중국 건국 60주년 기념으로 주중한국대사관에서 개최한 ‘한국 미식의 밤’ 행사(2009. 10. 28)

최근 중국에서 열린 한중정상회담

ㅇ 최근 중국에서 열린 한중정상회담(2012. 1. 9)

공공누리의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누구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