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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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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이종암(李鍾巖 : 1896 ~ 1930)
작성일 : 2011-02-08 조회수 : 8,100 pic92.jpg pic92-1.jpg

pic92 전경

pic92-1 전경

대구 달성 하빈이씨 사직공파 가문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농업학교를 거쳐 부산상업학교에 다녔다. 1916년 대구은행에 은행원으로 취직한 그는 출납계주임이 되어 금고 열쇠를 맡아 2년간 재직하다가 독립운동 자금으로 거금을 인출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8년 4월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직접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교관인 서상락(徐相洛) 등의 동의를 얻어 무관학교를 그만두었다. 이어 1919년 11월 9일 길림성 파호문(巴虎門) 밖에서 김원봉(金元鳳)·이성우(李誠宇)·황상규(黃尙奎)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으며 그와 김원봉은 중국 상해로 가서 불란서 조계(租界)에 사는 김성근(金聲根)에게 폭탄제조방법을 습득하였다. 그리고 의열단원 곽재기(郭在驥)·이성우(李誠宇) 등은 상해에서 폭탄과 권총을 구입하여 이를 국내로 반입하여 앞으로 있을 거사에 대비하였다. 이종암이 대구은행에서 가져온 돈은 이러한 의열단의 활동자금으로 유용하게 쓰여졌고, 그 일부는 동지인 구영필(具榮泌)에게 전해져 만주 봉천(奉天)의 비밀결사인 삼광상회(三光商會)를 설치하는 자본금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1922년 3월 그는 김원봉·김익상(金益相)·오성륜(吳成崙) 등과 함께 필리핀에서 상해로 오는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처단하기로 결정하고 다나카가 3월 28일 상해에 상륙할 때 처치하되 차질이 생기면 일본영사관에서 있을 예정인 연회식 때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거사 당일 전중이 상해의 세관부두로 상륙하자, 세관부두에 김익상과 오성륜 동지가 배치되었으므로 그는 거사의 성공을 빌며 소식을 기다렸으나, 불행히도 다나카 처단의거는 실패하고 두 동지만 일경에게 피체되고 말았다. 1925년 9월 재정사정의 궁핍으로 활동이 힘들어지자 그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을 계획을 세우고, 신채호(申采浩)가 의열단선언서인 「조선혁명선언서」를 지참하고 대구로 잠입하였다. 그곳에서 이병호(李丙浩)의 안내로 이병태(李丙泰)를 만나 자신이 전에 부산금융조합에 예금한 돈을 받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때 이미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고, 그가 잠시 요양중이던 경북 달성군 달성면 이기양(李起陽)의 산장에서 1925년 11월 5일 일경에 피체되고 말았다. 그는 1926년 1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루는 중 고문후유증으로 1930년 5월 29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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