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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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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유장렬(柳장烈 : 1878 ~ 1966)
작성일 : 2011-02-08 조회수 : 6,195 pic89.jpg pic89-1.jpg

pic89 전경

pic89-1 전경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천여명의 제자를 거느린 명유(名儒)로서 정미의병 당시인 1909년 전북 일대에서 박경석(朴景錫), 채복만(蔡福萬) 등 수많은 의병들을 이끌고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경술국치 후 1912년 말 임병찬(林炳瓚)이 조직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 한훈(韓焄)·이기상(李起商) 등과 함께 참여하여 일본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에게 국권반환요구와 철병요구서를 제출하였다. 1913년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한 훈·김상옥(金相玉)·황상규(黃尙奎) 등과 함께 경북 풍기(豊基)에서 일제 총독부 요인과 친일파 숙청을 목표로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였으며 1915년 대구의 국권회복단(國權恢復團)과 협력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동회의 전라도지역 조직 확대에 힘쓰는 한편 일본인 촌천횡일을 처단하고 군자금을 수합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특히 1916년 5월 한훈·곽경열(郭京烈)과 함께 전남 보성군(寶城郡) 벌교리(筏橋里)의 서도현(徐道賢)과 박곡(朴谷)의 양재학(梁在學) 등 친일파 수명을 처단하였으며, 1917년 1월에는 일경의 수배 속에 서도현의 조카 서인선(徐仁善)을 납치하여 군자금 14,000원을 마련하였다. 또한 오성(烏城)의 일본 헌병분견소를 엄습하여 장총 1정, 권총 1정 및 군도 1개를 탈취하고 계속해서 일경과 친일파 처단 및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 그후 1918년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노출되어 동지들이 피체되자 그는 피신하였다. 또한 1919년 4월 이병하(李秉夏)·김제원(金濟元) 등과 함께 전북 고창의 부호 김기팔(金箕八)의 집을 엄습하여 군자금 2,630원을 모금하였고, 이어 전주의 부호 모씨가(某氏家)를 엄습하여 군자금을 획득하려다가 일경의 급습을 받고 교전 끝에 피체되고 말았다. 이일로 인하여 1919년 10월 4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12년형을 언도받고 전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이전의 서도현(徐道賢) 처단 및 서인선으로부터 획득한 군자금 관계, 그외 독립운동 활약이 탄로되어 1922년 11월 징역 5년형이 추가 구형되는 등 전주·광주 등으로 옮겨다니며 혹심한 고문과 악형을 당한 끝에 반신불수의 몸으로 15년 만에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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