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 시어록비
독립기념관 경내에는 야외 전시물인 애국 선열들의 시·어록비가 건립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순신 등 전통시대에 국난을 극복한 인물과 김구 등 일제 침략기에 독립운동을 주도한 애국선열들의 불굴의 민족혼과 자주 독립의지가 담긴 어록이 새겨져 있습니다. 짧은 글 속에 녹아있는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과 고귀한 나라사랑 정신은 우리들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질 것입니다.
시·어록비 위치도 다운로드- 107. 우재룡(禹在龍 1884~1955)
- 1884년 1월 3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대지면(大池面) 왕산리(旺山里)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02년 대한제국 군대 대구진위대(大邱鎭衛隊)에 입대하여,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될 때까지 참교(參校)로 5년간 복무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을 맞은 상황에서 정용기가 의병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그 해 (음)7월 일부 군인들과 함께 무기를 빼돌려 청송의 산남의병을 찾아갔다.산남의병에서는 연습장(練習長)을 맡아...
- 104. 여운형(呂運亨 1886~1947), 김규식(金奎植 1881~1950)
- 몽양(夢陽) 여운형 선생은 1885년 4월 경기도 양평(楊平)에서 출생하여 배재학당, 흥화학교 등에서 신학문을 익혔으며, 1908년에는 기호학회 평의원으로 활동하였고, 1910년 강릉의 초당의숙에서 민족교육에 매진하였다. 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였으며,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크게 부각시키기 위해 장덕수를 일본에 파견하여 2·8독립선언을 촉발케 하였다.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부 차장,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
- 98. 장형(張炯 : 1889 ~ 1964)
- 호는 범정(梵亭)이며,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다. 1909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접하면서, 도산 안창호(安昌浩), 의암 손병희(孫秉熙)의 반일애국독립사사에 영향을 받았다. 이후 양기탁(梁起鐸)·유동열(柳東說) 등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였으며,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가서 이 극(李極)·안창하(安昌夏)·이진산(李震山)·전덕명(全德明) 등에게도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한다. 그리고 이 극을 통하여 전덕원(全德元)·오동진(吳東振)·오광선(吳光鮮) 등에게도 군자금...
- 96. 안재홍(安在鴻 : 1891 ~ 1965)
- 호는 민세(民世)이며, 경기 평택(平澤)에서 태어났다. 1912년 일본 동경(東京)에 거주하던 한국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1913년 1월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에 재학중 중국 상해 건너가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서울에서 청년들을 규합하여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고 총무를 담당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9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 95. 김약연(金躍淵 : 1868 ~ 1942)
- 호는 규암(圭巖)이며,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어났다. 1907년에 간도 화룡현(和龍縣) 지신사 명동촌(明東村)에 연변(延邊) 교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서 활동하였으며, 1909년에는 간도 간민회(墾民會)를 이동춘 등과 함께 조직하여 역시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908년에는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여 숙감(塾監)을 역임하였으며 1910년에는 명동중학교로 발전시켜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청년들의 애국정신을 함양하였다. 1912년에 이동휘(李東輝)가 명동으...
- 93. 박인호(朴寅浩 : 1854 ~ 1940)
- 호는 춘암(春菴)이며, 충남 덕산군 장촌면 막동(현재 충남 예산 삽교읍 하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 천도교 대도주(天道敎 大道主)로서 3·1독립운동의 중앙지도체 49인 중 한사람으로 활동하였다. 1883년 동학(東學)에 입도하여 1884년에는 손병희(孫秉熙)와 더불어 공주 가섭사(迦葉寺)에 들어가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종교적 수행을 지도받고, 그 뒤 충청도 예산지방에서 포교활동에 전념하여 서산지방의 박희인(朴熙寅)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 1894년 동학...
- 91. 안병무(安炳武 : 1912 ~ 1986)
- 호는 해암(海菴)이며, 평남 안주읍 신의리에서 태어났이다. 1930년 상해 유학을 떠나 복단(復旦)대학에 재학 중 1932년 상해 사변이 발발하자 천도교 청우당원(靑友黨員)으로 복단대학 학생의용군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하였으며, 중국19로군(中國十九路軍)에 편입하여 대일전에 참가하였다. 한편 상해 한인학우회에 가입하여 재무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937년부터는 남경(南京)에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의 청년단에 가입하여 역보(力報), 항전일보(抗戰日報), 건군반월보(建軍半月報) 등...
- 89. 유장렬(柳장烈 : 1878 ~ 1966)
-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천여명의 제자를 거느린 명유(名儒)로서 정미의병 당시인 1909년 전북 일대에서 박경석(朴景錫), 채복만(蔡福萬) 등 수많은 의병들을 이끌고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경술국치 후 1912년 말 임병찬(林炳瓚)이 조직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 한훈(韓焄)·이기상(李起商) 등과 함께 참여하여 일본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에게 국권반환요구와 철병요구서를 제출하였다. 1913년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한 훈·김상옥(金相玉)·황상규(黃尙奎) 등과 함께 경북 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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