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이남규(李南珪 : 1855 ~ 1907)
호는 수당(修堂). 서울의 미동(尾洞)에서 태어나 집안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882년 4월 정시문과에 급제 후, 1894년까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 승정원 우승지, 형조참의, 영흥부사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890년대에 들어 일제의 대한침략이 가속화되자, 선생은 각종 상소를 통해 일제의 침략책동을 신랄하게 규탄하며 일제의 침략에 대한 대비책 수립과 동맹국들과 연대하여 일제를 토벌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이후 선생은 관직을 사직하고 향리에 칩거하며 상소를 통하여 일제의 대일침략을 규탄하였다. 선생은 1906년 민종식(閔宗植) 홍주의진의 홍주성 탈환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일제에게 패한 민종식 의병장이 피신하게 되자 민종식 의병장을 고향인 예산에 은신시키는 등 배후에서 많은 지원을 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의 헤이그 특사파견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확산되자, 선생과 선생의 장남 충구(忠求)에 대한 경계와 감시를 계속하던 일제는 선생에 대한 회유를 계속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선생을 피체하였고, 선생은 충남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 냇가에서 장남 충구와 함께 1907년 9월 피살 순국하였다.
공공누리의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누구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