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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이승희(李承熙 : 1847 ~ 1916)
작성일 : 2011-02-08 조회수 : 6,424 pic88.jpg pic88-1.jpg

pic88 전경

pic88-1 전경

호는 한계(韓溪)이며,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을 때에는 수백명의 유생을 거느리고 소수(疏首)가 되어 을사오적(乙巳五賊)을 목베이고 조약의 파기를 요청하는 '청주적신파늑약소(請誅賊臣罷勒約疏)를 올렸다. 그해 12월 25일에는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어 일인의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옥중에서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일본의 비위(非違)를 논리적으로 지적하는 옥중 투쟁을 전개하였다. 다음해 4월 석방되었으나 국외로 망명하기까지 끊임없이 일경의 감시를 받았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성주(星州)의 국채보상단연회(國債報償斷煙會)의 회장이 되어 활동하였으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서한을 보내어 일본의 침략만행을 규탄하였다. 그리고 그가 직접 회의에 참석하여 일본대표와 대질하겠다고 제의하였다. 동년 광무황제의 강제 양위와 융희제(隆熙帝)의 등극 소식이 있자 그는 가일층 분노하여 일제에 이 사실을 항의하고 양위의 부당성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였다. 1908년 일제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자 그는 문인(門人) 김창숙(金昌淑) 등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여기서 이상설(李相卨)·안중근(安重根)·유인석(柳麟錫)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에는 이상설·유인석 등과 함께 만주와 노령의 국경 지대인 밀산현(密山縣) 봉밀산(峰密山)에 황무지 45방(方)을 구입하여 100여 가구를 정착시켜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한흥동(韓興洞)이라 명명하였다. 또한 이곳 한흥동에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세우고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어 민족의 역사를 가르치는 등 민족교육을 실시하였으며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반을 닦았다. 1913년에는 안동현으로 옮겨 한인공교회(韓人孔敎會)를 창설하고 강유위(康有爲)·이문치(李文治) 등 중국공교회 간부들과 친선을 도모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14년에는 상해의 박은식(朴殷植)과 연락하여 언론기관의 설립과 국사교육을 논의하였으며, 중국 북경(北京)과 천진(天津) 등에서 활약하다가 1916년 2월 28일 중국 심양 서탑(西塔) 일승잔(日昇棧)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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