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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조시원(趙時元 1904~1982)
작성일 : 2024-10-25 조회수 : 33 조시원_어록비(앞면).jpg





조시원(趙時元, 1904. 10. 23 ~ 1982. 7. 18)선생은 1904년 10월 23일 경기도 양주군 남면 황방리에서 부친 이화제(理化齊) 조정규(趙禎奎)와 모친 박필양(朴必陽) 사이에서 7남매 중 6남으로 출생하였다. 본명은 용원(鏞元), 호는 호일(胡逸), 시원(時元)은 별명이었는데, 통명(通名)으로 사용하여 본명 같이 불려졌다.

1920년 2월에 상해로 망명한 선생은 1927년 상해에서 조한용(趙漢用), 오명(吳明), 이동농(李東?) 등과 같이 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中國本部 韓人靑年同盟) 상해지부(上海支部)를 결성하였다. 그 해 10월에는 중국본부 한인청년총동맹(中國本部 韓人靑年總同盟)을 창립하여 중앙위원장(中央委員長)에 선임되었다.

1928년에 선생은 한구(漢口)에서 결성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 창립에 참가하여 간부의 일원으로 국제적인 항일선전운동(抗日宣傳運動)에 주력하기도 하였다. 이후 만주로 가서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梁世奉) 장군과 협의하여 함께 동만청년동맹(東滿靑年同盟)을 조직하고 이를 지도하여 무장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만주 흥경현민립중학교(興京縣民立中學校) 학감(學監)으로 3년 동안 육영사업에도 종사하고, ≪중국대공보(中國大公報)≫, ≪시민일보(市民日報)≫ 기자 등 직책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9년에 선생은 북경으로 가서 여기서 1925년에 조직된 항일비밀운동단체인 다물단(多勿團)에 가담하여 이규준(李圭俊)·이해천(李海天) 등과 같이 상해, 천진(天津), 북경 등지에서 친일주구배 등의 숙청공작을 전개하였다.

1930년에는 상해에서 화랑소년회(花郞少年會)를 조직·지도하고, 그 해 겨울에 월간잡지 ≪한보(韓報)≫의 편집위원으로 활약하며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천진대공보사(天津大公報社)에 교섭하여 ≪한국문원(韓國文苑)≫을 발간하는 등 문화사업에도 진력하였다.

1933년 한국독립당에 가입하고 특파원으로 서안(西安)에 파견되어 중국서북군 총사령(中國西北軍 總司令) 양호성(楊虎城)과 한·중간 무장 항일운동 근거지건설에 관한 군사협력을 교섭하였다. 이듬해에는 북경으로 가서 조성환(曺成煥), 이광(李光), 이상일(李相一) 등과 같이 항일투쟁을 벌였으며, 1935년에는 조소앙, 홍진(洪震), 김사집(金思集) 등과 같이 월간잡지 ≪진광(震光)≫을 발간하였다. 1938년 사천성(泗川省) 기강(?江)에서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등 3당 통합회의에 조소앙, 홍진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석하였다. 협의를 통해 중국 관내 우파 통합정당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자 선생은 중앙상임위원(中央常任委員)으로 선임되었으며, 비서부장(秘書部長), 조사부장(調査部長), 조직부장(組織部長), 선전부장(宣傳部長) 등을 역임하였다. 그해 10월에 기강에서 열린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제31회 회의에서 의원 겸 비서장으로 선임되고, 11월에는 임시정부 선전위원(宣傳委員), 특파원(特派員), 선무단장(宣撫團長) 등으로 임명되어 입법·행정 양면으로 활약하였다.

1940년 9월 17일에 선생은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창군에 참여하여 총사령부 부관(副官)에 임명되었고, 총사령부가 중경(重慶)에서 서안으로 옮겨짐에 따라 서안으로 가서 부관처장대리(부관주임)로 복무하였다. 1941년에는 중국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 특과총대학원대 한청반(中國中央戰時幹部訓練 第4團 特科總大學員隊 韓靑班)에서 안일청(安一淸), 한유한(韓悠韓), 송호성(宋虎聲) 등과 함께 군사 교관으로서 전술, 역사, 정신교육을 담당하여 민족정신 앙양에 진력하였다. 1942년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법무처장(法務處長), 정훈처장(政訓處長), 특파원(特派員) 등을 역임하며, 광복군 정령(正領)으로 복무하였다. 이후 항일 무장투쟁을 계획하고 본토상륙작전을 준비하던 중 일제의 항복으로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을 맞아 그 해 12월에 임시정부 제2진으로 환국하였다.

선생은 1982년 7월 18일 향년 79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광복회장(光復會葬)으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봉안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국가보훈부 2004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내용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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