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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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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우재룡(禹在龍 1884~1955)
작성일 : 2024-07-16 조회수 : 155 indememorial24.png


1884년 1월 3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대지면(大池面) 왕산리(旺山里)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02년 대한제국 군대 대구진위대(大邱鎭衛隊)에 입대하여,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될 때까지 참교(參校)로 5년간 복무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을 맞은 상황에서 정용기가 의병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그 해 (음)7월 일부 군인들과 함께 무기를 빼돌려 청송의 산남의병을 찾아갔다.

산남의병에서는 연습장(練習長)을 맡아 의병들에게 근대적 군대 경험을 전수하였다. 같은 해 11월 16일에는 수장(首將) 정완생(鄭完生) 밑에서 부장(副將)을 맡아 흥해군 신광(神光)의 분파소를 불태우고 직접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순검 1명씩을 처단하였다. 1908년 무기 구입을 위해 대구로 잠입했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9월 14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내란죄·강도죄 등으로 종신 유형을 받았다.

일제의 강제병합 직후인 1911년 이른바 ‘은사령(恩赦令)’에 따라 ‘합방특사(合邦特赦)’로 풀려났다. 이후 만주를 오가며 함께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대한광복회가 결성된 후 사령관 박상진 밑에서 권영만과 함께 지휘장(指揮長)을 맡아 활동하였다. 1915년 12월 경주에서 대구로 운송되는 세금을 실은 우편마차를 공격하여 8,700원을 탈취한 ‘경북 우편마차 암습사건(暗襲事件)’을 주도하였다.

이후 만주로 파견되어 안둥(安東)에 상주하면서 만주 지린의 광복회를 중심으로 대한광복회 본부와 서간도의 부민단(扶民團)·신흥학교(新興學校) 등과 연계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18년 8월경 단원 이종국(李鍾國)의 밀고로 대한광복회 조직이 발각되어 다수의 동지들이 검거되었을 때 경기도 경찰부에 붙잡혔으나, 다행히 탈출하여 만주로 몸을 피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6월 서울 경신학교(儆新學校)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주비단(籌備團)에 참여, 6천여 원의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서울과 논산·군산 등지를 오가며 활동하던 중 1921년 5월 군산에서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모진 심문과 고문을 당하였다. 같은 해 12월 22일 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1922년 4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등으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1937년 감형되어 풀려나기까지 옥고를 겪었다. 1945년 12월 서울에서 권영만·이관구(李觀求)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를 재건하고 부회장을 맡아 독립운동 유적지를 정화하는 사업에 전념하다가, 1955년 3월 3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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