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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김광제(金光濟 : 1866~1920)/서상돈(徐相敦 : 1850~1913)
작성일 : 2011-02-08 조회수 : 6,413 pic87.jpg pic87-1.jpg

pic87 전경

pic87-1 전경

ㅇ 김광제(金光濟 : 1866~1920) 호는 동양자(東洋子)이며, 충청남도 보령군 웅천면 평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광문사(廣文社)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등과 함께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國債一千三百萬 報償趣旨書)」라는 격문을 전국에 발송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하였다. 그 요지는 대한민국 2천만 명이 담배를 끊어 담배값 20전씩을 3개월간 저축하면 1천3백만 환이 되므로 전국민이 3개월간 단연(斷煙)하여 그 돈으로 이완용 내각이 일본으로부터 차관한 1천 3백만 환을 갚아서 경제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김광제는 동지들과 함께 대구에서 국채지원금수습사무소(國債志願金收拾事務所)를 설치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서울에서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 등을 비롯한 민족언론기관들의 적극적 호응을 얻은 결과 전국적 운동으로 발전하여 전국각지에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 단연회(斷煙會) 등의 조직이 결성되고 지원금이 답지하였다. 국민들의 국채보상운동에의 참여는 매우 자발적이고 열성적이어서 성인들은 자발적으로 담배끊기를 단행하였고 여성들은 비녀와 반지를 내놓아 이에 호응했으며, 머리털을 잘라 팔아서 이 운동에 호응하는 여학생들도 다수 나오게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에 크게 놀란 일제는 이 운동을 탄압하는 방법으로 대한매일신보사 안의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國債報償志願金總合所) 총무 양기탁(梁起鐸)을 근거도 없이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했다가 무죄로 석방하였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유언비어가 퍼짐으로써 국채보상운동은 점차 퇴조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압록강 대안의 동로홍묘자(東路紅廟子)에 일신학교(日新學校:후에 興東學校로 개명)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여 교육구국운동에 종사하였다. 1919년 3 1운동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서 유학생들과 함께 3월 1일에 독립선언서를 국내 및 동경의 한국인에게 배포하고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1920년 7월 24일 경남 마산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ㅇ 서상돈(徐相敦 : 1850~1913) 경북 김천시 지좌동에서 태어났다.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하였고, 1907년 대구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국채보상운동(國債補償運動)을 주도하였다. 서상돈은 1898년 3월부터 전개된 만민공동회에 독립협회 재무담당 간부로 참가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내정문제로 민권보장 및 참정권획득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독립협회가 수구파에 의해 해산되자, 그는 대구로 와 광문사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자들의 저서를 출판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1월 대구 광문사의 특별회에서, 서상돈은 김광제(金光濟) 사장과 함께 일제에 빚진 1,300만원을 갚기 위한 금연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800원을 선뜻 내놓았다. 이때 서상돈은 전체 인구 2,000만명이 담배를 끊어 그 돈을 모으면 부채를 모두 갚을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렇듯 금연운동에서 비롯한 국채보상운동의 움직임은 서울의 󰡔대한매일신보󰡕에 「국채보상취지서(國債報償趣旨書)」가 발표되면서 전국적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서상돈 등은 1907년 2월 대구 북후정(北後亭)에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 수합사무소(國債志願金收合事務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일대 사회운동으로 발전하여 나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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