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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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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양우조(楊宇朝 1897~1964)

소벽(小壁) 양우조 선생은 평안남도 강서(江西) 사람으로 평양에서 성장하였다.
1915년 상해로 망명하였다가 191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재미대한인국민회에 가입, 활동하였다.
1918년에 미국 인디아나주 사우드밴드 시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동년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재미한국유학생회에 입회하였으며 1921년에는 흥사단(興士團)에 입단, 도산 안찬호(安昌浩)의 가르침을 따랐다.
1922년 사우드밴드 중학교를 졸업한 후 마사추세주 뉴벤포드 공과대학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1927년에는 폴리버 방적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31년 1월초에 상해에서 흥사단 제17회 원동대회(遠東大會)가 개최되자 그는 설비위원장(設備委員長)에 임명되었으며, 1933년 1월 2일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서 흥사단의 원동대회가 개최되었을 때에는 원동반 제6반 반원으로 참석하여 활약하였다. 또한 이해에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으로 보선되어 광복 시까지 임정에서 활약하였다. 1934년 6월에는 한국국민당의 광동지부원이 되었으며, 1935년 1월에는 동당 감사(監事)로 임명되었다.
1936년에 한국국민당을 창립하여 이사로 선임되고 임정 상임위원에 임명되었다.
동시에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듬해에는 전국연합진선협회의 이사로도 선임되었다. 1939년 10월에는 사천성 기강에서 국무원을 개선하고 임시정부 선전위원회를 특설하니 그는 다시 선전위원이 되어 국위선양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1940년 5월 9일에는 각 당이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이 창립되자 그는 중앙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942년 9월에는 광복군사령부 정훈실장 대리를 지냈으며, 동년
2월에는 임시정부에서 3.1절 기념준비위원회를 개최할 때 의식조원으로 활약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년 10월에는 임시정부 재무부 부원으로서 선전위원을 겸하였으며, 예산결산위원장이 되어 임시정부 의정원의 예산결산 문제를 다루었다.
1943년 4월에는 임시정부의 생계부 차장 겸 총무과장이 되어 교포의 생활과 지위향양을 도모하였으며 5월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집해위원회 상무위원 겸 재무부 주임을 역임하였고 1944년 7월 10일에는 임시정부 회계검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1945년 6월에는 한국광복군 정령으로 정훈처 훈련과장의 직을 수행하다가 광복 후 1946년 5월에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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