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춘암(春菴)이며, 충남 덕산군 장촌면 막동(현재 충남 예산 삽교읍 하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 천도교 대도주(天道敎 大道主)로서 3·1독립운동의 중앙지도체 49인 중 한사람으로 활동하였다. 1883년 동학(東學)에 입도하여 1884년에는 손병희(孫秉熙)와 더불어 공주 가섭사(迦葉寺)에 들어가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종교적 수행을 지도받고, 그 뒤 충청도 예산지방에서 포교활동에 전념하여 서산지방의 박희인(朴熙寅)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덕의 대접주로 승천곡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시키고 예산군 홍주성전투를 지휘하였으나 외세의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그후 1908년 1월 18일 천도교 대도주(大道主)가 되어 천도교의 정신적·경제적 지주가 되었고 그 조직을 활용하여 개화문명의 보급과 독립사상 고취를 위해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21일 3·1운동의 민족대표 손병희의 명으로 천도교 보관금 중에서 5,000원을 최린(崔麟)에게 지급하여 3·1운동 경비조로 지원하였고 2월 28일에 천도교 이종일(李鍾一)·이종린(李鍾麟)·윤익선(尹益善) 등과 함께 협의하여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을 천도교 경영 인쇄소 보성사(普成社)에서 인쇄하여 전국으로 배포케 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3월 1일이 되자 천도교 대도주로서 3·1독립운동의 중앙지도체 49인 중 한사람으로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그는 재판관할권 문제로 오랜기간 구류된 끝에 1920년 12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언도받아 출감하였으나 미결기간으로 1년 9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93. 박인호(朴寅浩 : 1854 ~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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