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관 ‘나라되찾기’는 조국독립을 위해 국내외 각지에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시작된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봉오동·청산리 전투로 대표되는 독립군의 활동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외 각지에서 벌어진 의열투쟁과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의 활동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19세기 중반부터 한인들은 압록강·두만강을 넘어 중국 동북지역과 연해주 등지로 이주했습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전후하여서는 많은 애국지사들도 망명하여 이곳에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은 독립군을 편성하여 일제를 대상으로 한 독립전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일본군은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하여 중국 동북지역과 연해주지역에 병력을 파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20년 6월 독립군을 추격해 온 일본군이 봉오동 골짜기까지 들어왔다가 격파되는 봉오동 전투가 벌어집니다. 이를 계기로 일제는 10월 자국민까지 희생시키며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일으키고, 이를 빌미로 대대적인 독립군 탄압을 실시합니다. 이러한 일제의 의도를 간파한 독립군단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이동하던 중 청산리 일대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10여 차례 전투를 펼쳐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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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흥학우보 新興學友報 제2권 2호(1917. 1. 13)
- 신흥무관학교 교사와 졸업생들이 조직한 신흥학우단에서 간행한 잡지.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서간도 싼위안푸三源浦에서 설립된 독립군 양성기관이다.
<수잔안(Susan Ahn)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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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회영李會榮 의복
- 경학사·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회영(1867~1932)의 중국식 의복.
<이규창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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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군 장교 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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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군 일반 병사 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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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팡이 칼
- 독립군이 호신용으로 휴대하던 지팡이.
지팡이 손잡이를 빼면 칼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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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식 보병소총(일본제)
- 1905년(명치明治 38년)에 제작되어 38식이라 호칭한 일본 육군이 사용한 소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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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식 단소총(일본제)
- 38식 보병 소총을 개량하여 1939년 일본육군이 개발한 볼트액션식 소총.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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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젤 권총(독일제)
- 1896년 독일인 모젤형제가 개발한 권총.
청나라 말기 이래 중국에서 사용되었으며 독일은 1936년까지 이 총을 생산해 중국에 수출했는데, 독립군들도 이 권총을 애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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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년식 권총(일본제)
- 일본군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8mm남부탄南部彈을 사용한 자동식 권총.
1925년(대정14년)에 제작되어 14년식이라 호칭하였다.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에 대패한 일본군은 만주의 독립기지를 파괴하고 한인을 대학살 하는 ‘간도참변’을 일으켰습니다. 독립군 부대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북만주 밀산을 거쳐 1921년 러시아 자유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볼셰비키는 독립군의 러시아 적색혁명에 참여할 것을 강요하였고, 이를 거부한 독립군들을 무장해제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나 ‘자유시참변’이라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이후 독립군들은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남만주에는 1922년 대한통의부가, 북만주에서는 대한독립군단이 조직되었습니다. 1924년 독립군단은 다시 육군주만참의부와 정의부, 신민부 3부로 조직되어 1920년대 후반까지 만주지역 한인의 자치를 주도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습니다.
1920년대 후반 일어난 민족유일당운동의 결과 만주지역의 독립군단은 국민부와 혁신의회로 양분되었고, 국민부는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조직하고, 혁신의회는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여 1930년대 항일투쟁을 지속하였습니다. 1930년대 중반부터는 항일유격대들이 중국공산당과 연합하여 동북인민혁명군으로 활동하였고, 이는 이후 동북항일연군으로 발전하여 줄기차게 국내진입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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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군 獨立軍의 경고문(1921. 2. 18.)
- 친일한 자나 적에게 항복한 자는 즉시 처단할 것이며 독립군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자는 내용으로 발표한 경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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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고일생전말기 自苦一生前末記
- 신민부新民府의 재무과장을 지낸 최문석崔文碩(1893~1970)이 신민부를 중심으로 북만주에서 보낸 독립운동의 행적을 기록한 자서전.
<최창화 기증>
의열투쟁은 한 개인의 힘으로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를 응징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강제병합 이후부터 수많은 의사․열사들이 폭탄과 권총, 비수를 들고 일제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의열단, 대한광복회, 27결사대, 철혈광복단, 병인의용대 등에서 소속된 의사들은 단체의 지원을 받아 개인 또는 몇 명이 함께 일제를 상대해 싸웠습니다. 의사들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 경찰서 등과 같은 식민지 수탈기관이나 이들 기관에 소속되어 있는 일제의 고관, 친일인사들을 의거에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조직된 한인애국단은 단장 김구의 주도 아래 이봉창․윤봉길 의사 등이 의거를 일으켜 침체된 독립운동의 활기를 불어넣었고, 조국광복의 의지를 전세계에 알려 중국정부의 지원과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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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옥金相玉태극기
-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 김상옥 의사(1889~1923)가 구국일념의 의지로 간직하고 있던 태극기.
<김태운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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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창의 선서문 (1931. 12)
- 이봉창 의사가 한인애국단에 입단하며 쓴 선서문.
내용은 “나는 적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고 적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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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봉길의 유품
-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공원 의거 현장으로 떠나면서 자신의 회중시계와 맞바꾼 김구의 회중시계.
<보물 제568-3호 / 충의사 제공>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직후부터 산하에 국군을 조직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0년대 후반부터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겨 1940년 9월 17일 중국의 전시수도인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은 창설하였습니다. 한편 중일전쟁 발발 다음해인 1938년 10월에는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서는 관내지역 최초의 한인무장조직인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습니다. 조선의용대의 일부는 태항산 팔로군 근거지로 이동하여 조선의용대로 재편되었고, 일부는 1942년 5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습니다.
한국광복군은 창설 후 중국 시안(西安)에 총사령부를 두고 충칭을 비롯한 각지에 지대를 설치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들은 일본군에 소속되어 있는 한인병사와 적 후방의 한인청년을 모집하는 초모공작을 벌이고, 이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 일본군에 대한 정보수집과 교란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일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이후 한국광복군은 미군 전략첩보국(OSS)과 국내진입작전을 위한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연합군의 일원으로도 인도, 버마(현 미얀마) 전선에 파견되어 대일항전에 참여하는 등 광복이 되는 그날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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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용대 朝鮮義勇隊 창립기념사진(1938. 10. 10.)
- 조선의용대는 1938년 중국 우한武漢에서 창설되어 호남성·광서성 등을 무대로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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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광복군총사령부 韓國光復軍總司令部 성립전례식 재현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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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광복군 배지
- 한국광복군 각종 배지류.
<송영호 기증>
국내외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의열 투사들의 활동을 대형 빔 영상으로 표현한 공간입니다. 영상 아래에는 독립운동가의 어록 또한 전시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