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관 ‘겨레의시련’은 근대적인 자주 독립 국가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좌절된 후 이어진 일제의 식민 지배 실상을 살펴보고 그 속에서도 계속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느껴볼 수 있는 전시관입니다.
19세기 동아시아의 개항은 서양 열강의 침략 속에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일제는 한국을 침략하였습니다.
한국은 근대화를 위한 개혁 정책을 실시하고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한 투쟁을 펼쳤으나 결국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식민 지배 기간 동안 자행된 차별적이고 야만적인 탄압과 수탈, 강제 동원 등은 우리 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고통을 남겼지만 독립을 향한 의지와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19세기 서양 열강의 접근으로 동아시아의 개항이 시작되었다. 동아시아 국가들 중 근대화를 추진한 일본은 조선에 군함을 파견하여 계획적으로 분쟁을 일으키고 개항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조선은 일본과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을 맺으면서 문호를 열었다. 이후 새로운 문물이 도입 되었지만 동시에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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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일수호조규
- 1876년 2월 26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근대적 조약으로 불평등한 내용을 담고 있다.
<1876,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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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영공원 育英公院 교과서
- 나라에서 세운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사용한 영어 교과서이다.
<1889, 독립기념관 소장>
19세기 중반 서양 열강의 접근으로 위기감이 고조된 가운데, 조선에서는 개항을 추진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과 열강의 개항 요구를 물리치고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서로 대립하였다.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각국과의 조약 체결 후 외세의 침략이 현실화되자 민중은 무기를 들어 저항하는 한편, 근대적인 정치 단체를 만들어 정부의 개혁을 촉구하였다. 민중의 요구에 조선 정부는 개혁을 추진하며 근대화된 자주 독립 국가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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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신문』 제1호
- 독립협회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의 제1호이다.
<1896, 독립기념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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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 여권
- 안창호가 1902년 미국으로 갈 때 대한제국 외부에서 발급 받은 여권이다.
<1902, 독립기념관 소장>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국 침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무력을 앞세운 불법적인 조약 체결을 강요하고 한국의 외교권과 행정권 등을 강탈하며 한국을 완전히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수순을 밟아 나갔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한국은 강력히 저항했으나 끝내 1910년 국권을 상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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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늑약문
-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전문이다.
국제법적 절차와 형식이 갖춰지지 않은 채 일제의 무력과 협박에 의해 불법적으로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강탈당했다.
<1905,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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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탄倂呑조약
-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병탄 조약의 전문으로,
이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겼다.
<1910,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차별적이고 야만적인 식민 지배를 시작하였다. 일제의 식민 지배는 겉으로는 ‘동화同化’를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철저한 민족 차별 정책으로 일관하였으며, 무력을 동원한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것이었다. 3・1 운동 이후에는 ‘문화 통치’라는 기만적인 정책으로 교묘하게 민족 분열을 획책하고 통제와 수탈을 강화하였다. 1930년대 들어 침략 전쟁을 확대한 일제는 민족 말살 정책을 본격화하였으며 한국을 병참 기지로 삼아 물자와 인력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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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숫자조선연구』 제1집
- 일제가 작성한 분야별 통계자료를 거꾸로 이용하여
일제 식민 지배 아래 한국의 실상을 폭로하고 비판한 책이다.
<1931, 독립기념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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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선일체 內鮮一體 비석
- 황국 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세워진 비석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 등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독립기념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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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중일지
- 중일전쟁 당시 무토 아키이치武藤秋一가 쓴 일지로,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1937 ~ 1938, 독립기념관 소장>